한국대학신문 홈 > 칼럼/이슈 > 대학50년사

여자대학에 1호 인가서가 웬 말? 
일제 말기 식민 통치가 극에 달하면서 교명까지 박탈당했던 이화여전은 해방 직후의 사회적 혼란과 미흡한 교육체제 속에서도 어느 대학보다 발 빠르게 종합대학 승격을 위한 활동을 벌여 나갔다.

그런데 당시 상황은 확정된 제도가 없다보니 일정한 법 절차를 거쳐 인가를 받거나 별도의 학교 재개 절차가 없었으며, 교수진이나 종합대학제 재정, 대학 승격 인가신청서 제출, 학생모집 등이 선후없이 동시에 진행됐다.

매일신보는 해방 이후 한달 남짓한 시점인 1945년 9월 19일자 기사를 통해 “이화여자전문학교(경성여자전문학교)가 여자대학으로 발족한다”며 “동교는 과거 반세기 동안 조선 여성의 계발과 지육 향상을 위하여 꾸준히 많은 인재를 육성하여 왔는데 이번에 내용도 문과, 가사과, 음악과, 교육과, 보육과, 체육과, 미술과, 의학과, 약학과 등 9과로 확충하고 전문부(3년),학부(3년)를 두어 ‘이화여자대학’으로의 승격을 당국에 신청하였다”고 보도했다.

이화여대 종합대 승격 1호 인가

이화여전은 특히 1945년 9월 24일자 매일신보에 전공학과를 문과 가사과, 보육과, 교육과, 음악과, 의학과 등으로 명시한 ‘이화여자대학’, 명의의 학생 모집 광고를 전격적으로 내보내 종합대학 설립을 기정 사실화했다. 뒤 이어 1945년 10월 10일에는 첫 입학시험을 치르고 의학과를 제외한 지원자 대부분을 합격자로 받아들여 전교생이 9백13명에 달했다.

문교 통계 요람에 따르면 1945년 해방 당시 대학생 총수가 7천8백19명이고, 이중 여대생이 1천86명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여대생 가운데 90.3%가 이화여대 학생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사실 이화여대가 미 군정청으로부터 종합대학 인가를 받은 시점은 이보다 1년여가 지난 뒤에 이루어졌다.

인가서를 기준으로 하면 이화여대가 신청일자가 46년 6월 24일로 기록된 제1호 인가서를, 연희대는 1946년 7월 31일부로 기록된 제2호 인가서를 미군정청 학무국으로부터 받았으며, 고려대는 신청일자가 1946년 8월 5일부로 기록된 제3호 인가서를 받아 8월 15일 종합대학 승격의 법률적 토대를 마련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당시 미 군정 당국이 이화여대에 인가서를 주지 않고 지연한 이유가 엉뚱한 데 있었다는 것이다.

인가서 발급을 고의로 지연(?)

당시 이 대학 총무처장으로 신청서류를 직접 미 군정청에 접수시킨 김애마 처장은 지난 94년 발간된 이화여대 1백년사에서 “무엇보다 서류의 완벽을 기하는 데 주력하였으나 가장 큰 문제는 학무국이 의학과 신설에 따른 실습병원 설치가 안되었다는 구실로 인가를 지연시킨 사실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화여대 초대 총장을 역임한 김활란 총장은 자신의 회고록 ‘그 빛 속의 작은 생명’에서 “당시 학무국이 종합대학 인가서를 지연시킨 실제적인 이유는 여자대학교에 종합대학교 제1호 인가를 내줄 수 없다는 기본 입장 때문이었다”고 밝혀 당시의 정서를 반영했다.

결국 해방 공간에서 벌어진 이화의 이같은 교육열은 제도와 절차를 뛰어 넘어 여성 교육을 선도한다는 자부심으로 자리매김됐으며, 광복 직후 9개학과 9백13명에 불과하던 학생수가 오늘날 2만여명이 넘는 명실상부한 종합대학으로 성장하는 토대가 되기도 했다.

■ 열풍 일으킨 이화학당 ‘메이퀸’

1908년 5월 31일, 서울 정동의 이화학당 교정에서는 진기한 행사가 펼쳐졌다.

창립 24주년을 맞아 처음으로 개교 기념 축제를 열고 메이퀸(오월의 여왕)을 선발, 대관식을 갖는 것이었다. 초대 메이퀸으로 선정된 이는 학교 창설자인 스크랜톤.

흰옷에 붉은 댕기를 매고, 미투리를 신은 전교생이 행진하는 가운데 5월의 여왕이 중앙에 놓인 의자에 가서 앉으면 푸른 나뭇잎과 생화를 갖고 서 있던 학생들이 “당신을 여왕으로 모십니다”라고 합창하면서 엄숙하게 화환을 여왕에게 씌워주는 것이었다.

초창기 이화학당의 메이퀸은 학생이 아니라 이처럼 학교의 유공자나 존경받는 교사들 중에서 뽑혔다. 1914년의 메이퀸 최활란이나 1920년의 처치, 1923년의 밴플리트도 학생들 사이에 인기있던 교사였다. 1917년에는 당시 학생 신분으로는 유일하게 김활란이 뽑히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학생들 가운데 메이퀸이 뽑히게 된 것은 1927년 이후였다. 그리고 1933년부터는 일제의 종용으로 메이퀸 대신 자세 여왕을 뽑았다. 대륙 침략을 앞두고 준 전시체제가 강요되면서 자세가 곧고 걸음걸이가 아름다우며, 균형잡힌 체격을 지닌 학생을 선발하게 된 것.

1937년 중지됐던 이 행사는 1947년 아펜젤라 교장의 환갑 잔치와 더불어 부활됐다. 그 후 사회적 혼란, 6·25 등으로 인해 또다시 중단됐다가 1956년 학교 창립 70주년 메이데이를 기해 다시 시작됐다. 이때 메이퀸의 자격은 대학 4학년의 기독교신자로서 신앙생활이 돈독하며, 성적(3.0이상)과 품행이 우수하고 활동적이며 지도력이 있는 사람 중 키가 1백60㎝ 전후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방송계에 진출한 사람이 많았던 연세대에서도 60∼70년대 메이퀸 선발대회가 있었다. 옆에 위치한 이화여대생들에게 남학생들을 뺏기기 아쉬워 한 연세대 여학생들의 자체적인 움직임이기도 했지만 당시 메이퀸이라는 의미는 가장 아름답고 지적인 여대생의 대명사였기 때문.

그러나 이화여대의 메이퀸은 70년대 들어 성의 상품화로 착각되기 쉽거나 평등권에 위배된다는 논란에 휩싸이면서 78년 24개과가 후보 선발을 거부한 것을 계기로 폐지됐으며 축제 때 선보이던 이화여대의 쌍쌍파티 역시 이런 이유로 82년 폐지되었다.

그런데 시대는 바뀌어 지난 98년에는 한 재학생의 슈퍼모델 선발대회 참가문제를 놓고 고민하던 이화여대가 이를 허용했다. 이유는 역시 ‘시대가 변한 만큼’이었다. ‘재학 중 혼인금지’ 등 해방 이후 보수적인 학풍을 유지해온 이화여대로서는 당시 파격적인 결정이었지만 금혼 학칙 역시 2003년 폐지돼 시대 변화를 실감케했다. 
입력 : 2004.01.15
ⓒ 한국대학신문(http://unn.net)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