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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유서 깊은 낙원동 교사 - 신흥 사학의 산실
어떤 명문대학이라도 초창기의 교사(校舍)는 대게 규모가 작다. 지금의 이화여대는 작은 기와집 한 채에 가마 타고 찾아온 고관 댁 소실 한 명으로 시작되었다. 물론 그때는 대학이 아니지만 그것이 장차 대학으로 클 애벌레였다.
그런데 애벌레는 몸집이 불어나면 몇 차례 허물을 벗어 던져 버리지만 대학은 그럴 수가 없다. 우리나라 대학들이 불어나는 몸집 때문에 겪어온 고난은 상상을 초월한다.

경희대는 신흥대학 시절에 회기동에 터를 잡고 큰 교문을 세웠다. 파리의 개선문을 연상시켰다. 그래서 대문만 요란하게 허세를 부린 대학이라고 흉본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 개선문도 좁게 느껴져 더 크게 지었어야 옳았다는 이야기가 많다. 그나마 경희대가 일찍부터 교외로 빠져나가 회기동 빈터에 자리를 잡은 것은 참 잘한 일이다. 시내 한복판에 있었으면 어쩔뻔 했을까?

해방 후 새로 설립되는 대학들은 대개 시내 한복판에 터를 잡았다. 이는 외국의 경우도 거의 비슷하다. 그런데 이렇게 대학들이 시내에 터를 잡고 아무리 많은 돈으로 당시로서는 넉넉한 땅을 차지했다 하더라도 늘어나는 학생수를 감당하고 뻗어나가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박정권 말기에 군장성 출신이 세운 인천대는 언덕 위 빈터에서 시작하였지만 몸집이 불어나는 과정에서 담 밖의 가난한 판자집들과 싸움을 벌이면서 잔혹한 횡포를 부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런 마찰 없이 해결책을 찾는 대학도 점차 많아졌다. 주변의 가옥들을 사들이는데 한계를 느끼면서 타 도시에 분교를 짓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분교가 본교보다 더 커지면서 오늘날 제2, 제3의 캠퍼스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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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신흥대학으로 탄생한 건국대와 단국대, 국민대 등도 그처럼 시내 한복판에 자리를 잡고 애벌레 시절을 보내면서 고생한 대표적인 대학들이다.

그들이 처음 태어난 곳은 서울 한복판인 종로구 낙원동 282번지의 3층 양옥이다. 3층이라지만 1층은 반지하다. 연건평 3백여평이니 그래도 초창기 이화학당보다는 훨씬 컸다. 여기서 건국대와 단국대가 태동하고 국민대는 설립 기성회가 임시 사무실로 썼으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와 협성실업학교도 한 때 이 건물에서 배우고 가르쳤다.

여러 대학들의 산실이 되고 많은 학생들이 모여들었던 까닭에 이곳은 한 때 '낙원동 교사'로 불리면서 꽤 유명했던 곳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이 곳의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 다만 초창기 건국대를 거쳐간 학생이나 교수들이 이 건물에 얽혀있는 역사를 아는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일제시대나 해방 후에 이 낙원동 교사에 대한 추억이 담겨 있는 사람들은 아마도 이것이 지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데 대해 놀라고 섭섭한 마음을 금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는 지금 현대도시의 흉물처럼 느껴지는 거대한 4층 짜리 기계식 주차장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의 옛 정취가 아직 남아 있는 인사동 네거리에서 동쪽으로 백미터쯤 가면 낙원상가 뒤 왼편에 4층짜리 주차장이 있는데 바로 그 자리가 3층 교사가 있던 자리다. 주차장을 둘러싸고 있는 3∼5층 짜리 건물 3동은 60년대에 지어져 지금은 문화 예술 관련 단체 1백여개가 입주해 사무실로 쓰고 있다.

그리고 이 건물들 밖으로는 천도교회당이 있고 수운 최재우의 호를 딴 수운회관이 있다. 그 한길 건너 마주보는 곳에는 덕성여대 구캠퍼스가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최재우 선생을 그저 흘러간 역사의 인물쯤으로만 기억하지만 구한말에 몰려오기 시작한 서구세력에 맞서서 민족적 주체성을 지키며 개혁과 함께 새로운 교육운동에 앞장섰던 천도교의 역할은 대단한 것이었다. 고려대학도 보성전문 시절에는 천도교가 운영하며 이 낙원동 교사에서 민족의 인재들을 키워 나갔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부터 이 낙원동 교사가 만들어진 구한말로 시각을 돌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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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운명이 기울기 시작하던 구한말. 서북 출신의 이갑, 이동휘, 안창호 등이 서울에서 서북학회를 조직했다. 서북민들은 옛부터 늘 서울 중심의 중앙집권적인 지배 세력에 눌려 정치적으로는 소외된 집단이었다.

이들은 구국을 위한 강력한 힘을 모으기 위해 서북학회를 만들고 회관 건립에 착수해 33명의 공동 소유로 건물을 지었다. 이때가 1908년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 건물은 청나라 기술자를 불러들여 지을 만큼 당시로서는 자랑할만한 현대식 건축물이어서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것은 서북인의 만만치 않은 조직력을 서울의 기득권층에게 과시하는데 충분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청나라 기술자들에게 건축을 맡긴 것은 아주 특별한 뜻이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서북학회는 구국 항일단체였으니까요"

건국대 박물관의 채현석 학예과장은 이 건축물의 내력을 소상히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33명의 이름으로 지어진 것도 재미있다. 3·1 운동이 있기 전인데 이 건물도 33명의 이름이 박혀있다. 그리고 그 후 3·1 운동이 일어난 탑골공원과도 지척거리에 있다.

"우리는 이미 국가의 주권을 거의 왜국에게 강탈당해 버렸습니다. 왜국이 우리보다 앞서서 서양의 개화문명을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우리 서북인들도 일찍부터 개화에 앞장섰지만 왜국에 비하면 너무 늦었습니다. 지금이라도 어서 신학문을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그러니 어서 학교부터 세웁시다"

구국의 정치활동을 위해 조직된 서북학회는 구국의 길로서 먼저 교육사업부터 착수했다. 그래서 이 건물은 1910년부터 중등과정의 신식교육을 담당하는 오성학교 교사 건물로 쓰여졌다. 본격적인 교육시설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해에 한국은 마침내 일제에 강제 합병되었다. 그리고 데라우찌(寺內正毅) 총독은 이 학교를 곧 폐쇄시켜 버렸다.

그렇지만 3·1 운동 직전인 1918년이 되자 이 곳에는 보성전문학교가 들어서서 4년 동안 교사로 사용했다. 지금의 고려대학도 이곳에서 민족정신을 키우며 초기 단계를 거친 것이다. 이 때의 보성전문 운영 재단은 천도교였다. 천도교의 교회당이 지금도 바로 그 곁에 있듯이 동학혁명을 이끌었던 천도교는 관군과 왜군의 방해로 혁명에는 실패했지만 여전히 막강한 잠재력으로 민족의 주권회복과 문화창달에 힘쓰면서 [개벽]지를 발간하고, 학교를 운영하고 인재들에게 장학금을 주어가며 일제에 대항해 나갔다.

낙원동 교사는 보성전문이 자리를 옮긴 후 협성학교와 협성실업학교 교사로 쓰였다. 화신 백화점의 박흥식이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운영하다 역시 몸집이 늘어나 결국 동대문 밖으로 이전하면서 당시 민중병원을 운영하던 유석창에게 건물을 넘기는 1939년까지 교사로 사용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건물은 41년에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다시 일본 헌병대가 차지하면서 교사로서의 운명이 일시 단절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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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 되자 낙원동 교사에서는 좀더 복잡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해외로 망명했던 유동렬 등 서북 출신 인사들이 서북학회 소유권을 주장하며 이 건물의 반환을 요구하는가 하면, 조선 공산당이 이 건물의 지하실과 1층을 불법 점거하고 7∼8대의 인쇄기까지 설치해 조선공산당 기관지의 인쇄공장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는 유석창이 1939년 당시 박흥식에게 이 건물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건물 값 15만원 중 계약금 2만원만 지불해 소유권이 아직 완전히 이전되지 않은 상태였던 데에도 원인이 있었다. 일시적으로 주인이 없는 건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정이 유석창의 노력으로 해결되고 조선공산당이 그 해 10월 철수할 무렵, 이번에는 이 건물 2층에서 발기인회의를 연 것을 계기로 한민당이 이 곳을 본부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오늘날 종로가 정치 1번지로 불리게 된 원인도 낙원동의 중심에 있던 이 건물과 천도교 회관 등에서 당대에 내로라 하는 유명 정객들의 연설이 자주 열렸던 데 한 원인이 있다.

낙원동 교사는 46년 1월 한민당이 본부를 이전하면서 비로소 대학 건립을 추진하던 주체들이 모여 설립 의지를 다진 진원지가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의 행적은 곧 신흥 사학의 출발점이 되면서 당시 고등교육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46년 5월부터 이 곳에 건국대의 모체가 된 '조선정치학관'이 개설돼 학생을 받았으며, 국민대학설립기성회 임원들도 이 곳에 자주 모여 현안을 논의했다. 47년에는 교사 일부를 빌어쓰던 단국대가 문교부 인가를 받아 정규 대학으로 발족하기도 했다.

지금 이들 대학이 아무리 종합대학으로서 거대한 사학이 되었다 하더라도 낙원동 교사의 요람시절이 없는 종합대학은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낙원동 교사는 나라가 망하던 1910년부터 나라를 찾고 지키기 위해 이 땅의 선구자들이 교육의 정열을 불태우고 그 정신을 해방 후까지 이어갔던 곳으로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될 유서 깊은 곳이다.

그 후 낙원동 교사는 건국대 야간부 및 법인 사무실로 쓰여지다가 1977년 해체되고, 당시의 건물은 지난 85년 지금의 건국대 서울캠퍼스(모진동)에 이전, 복원되었다. 현재 이 건물은 설립자의 교육이념을 기리기 위해 '상허기념관'으로 명명돼 박물관으로 사용되면서 각종 유물과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낙원동 교사는 신흥사학의 산실이라는 역사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현실에 어두운 미군정의 대학 설립 차등화 정책과 맞물리면서 사학 분쟁의 불씨가 되고, 급기야는 학생간에 난투극이 벌어지는 갈등의 공간이 되기도 했다.

학생들이 살벌한 난투극을 벌이며 서로 분열되고 다투는 싸움이 벌어진 장면은 꼭 미국의 개척시대를 연상시킬 정도다. 그들처럼 말 타고 달리며 총질까지 한 것은 아니지만 무법의 공간에서 칼과 각목까지 동원해 혈전을 벌이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일들이 벌어진 이유는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다음 호에 계속> 【취재지원=이일형 차장】
한국대학신문 기자 (news@unn.net) | 입력 : 2000-07-31 오전 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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