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화, 산학협력 등 대학의 질적 변화가 절실하다. 프랑스도 대학교육 개혁을 통해 수월성 교육에 나서고 있다. 그랑제콜 등 엘리트 양성체제가 제대로 운영될 때 우수인재도 마음껏 재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래야 인재 유실도 막고 국가경영 엘리트도 길러낼 수 있다.”
피에르 타피 파리경영대학(ESSEC) 총장은 우수인재 양성 시스템 정립을 향후 대학교육의 방향성으로 규정했다. 기존의 그랑제콜을 두둔하는 소리만은 아니다. 기업과의 긴밀한 신뢰관계 구축, 세계 각국에서의 다양한 인턴십 교육, 외국학생 유치 센터 운영 등 그랑제콜도 다변화된 노력이 필요함을 누구보다도 강조하고 있다.
타피 총장의 이러한 소신은 ESSEC의 발전상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3년제에서 4년제로 전환해 인턴십을 강화하고, 미국식 경영전문대학원(MBA) 체제로의 혁신에 나섰다. 이에 따라 ESSEC은 최근 ‘월스트리트 저널’ 발표에서 세계 MBA 순위 7위에 올랐고, AACSB(미국경영대학협의회) 인증 결과에서도 북미권을 제외하면 최고 점수를 받았다.
글로벌화에도 앞장서고 있다. ESSEC은 싱가폴에 해외캠퍼스를 설립했고, 세계 각국에 외국인 학생 유치센터를 운영하고 있으며 영어강의 또한 크게 늘렸다. 국내에서는 서울대·연세대와 복수학위 협정을 맺는 등 국제 교류의 질적 강화에도 힘을 쏟고 있다.
다음은 타피 총장과의 일문일답.
- 사르코지 대통령의 대학개혁은 한국에서도 이슈가 되고 있다. 요체가 뭔가.
“크게 보면 대학의 자율권 부여, 대학에 대한 재정지원 확대, 핵심역량을 지닌 그랑제콜의 집중육성 세가지다. 세부적으로는 8월에 대학 자율권 부여를 골자로 하는 법안이 통과됐고, 이와 함께 현 150억 유로 수준의 고등교육 예산을 200억 유로로 끌어올리겠다고 밝혔다. 사르코지 정부의 ‘수월성 교육’ 이념에 걸맞은 그랑제콜 활성화 방침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 대학자율화, 고등교육 투자 확대 요구는 3불정책을 내세운 국내 현실과 비슷해 보인다.
“자율화라고는 하지만, 기여입학에 대해서는 미국과 달리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만 프랑스 일반대학은 무상으로 운영되는 데 반해, 그랑제콜은 연 1만 유로(약 1,300만원)의 학비를 낸다. 학비 중 30% 가량은 장학금·인턴십 지원 등으로 학생들에게 환원토록 노력하고 있다. 정부가 지원해주는 제도도 있기 때문에 실제 비용은 상당히 절감된다.
(고교등급제와 관련해서는) 학생들의 지적 능력을 선별해서 뽑는 것은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랑제콜은 우수한 학생을 선발해 비용을 들인 만큼 개인과 사회에 돌려주려고 노력한다. 그런 교육과정이 확립돼야 사회에 필요한 엘리트를 길러낼 수 있다.”
- 프랑스는 GDP 대비 고등교육 예산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다.
“대학 연구개발비로 GDP 대비 2.2%, 순수 그랑제콜 지원 개념의 1%를 합쳐 총 3.2% 정도 된다. 의료서비스를 비롯한 공공복지 측면에서는 프랑스가 최고 수준인 데 비하면 교육에 대한 투자가 지나치게 적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사르코지 정부의 고등교육 예산 증액은 부족한 감이 없지 않지만, 긍정적 방향이라고 평가한다.”
(※주: 현재 한국의 GDP 대비 고등교육 예산은 약 1%이다. 단, 프랑스는 그랑제콜이 아닌 일반대학을 무상교육 개념으로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포함한 실제 고등교육 예산은 그 격차가 훨씬 크다.)
- ESSEC의 국제화는 성공사례로 꼽힌다. 국내 대학들에게 조언한다면.
“사실 ESSEC도 예전에는 국제화 수준이 낮았다. 일례로 세계적 경영학교육인증 부여기관인 AACSB(미국경영대학협의회)도 국제화 부족을 들어 좋은 평가를 하지 않았다. 지금은 AACSB 인증 절차에서 북미 대학을 제외하고는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국제화의 덫’에 걸리지 않아야 한다. 국제화에도 구체적 목표가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학생들에게 국제화된 환경을 체험케 하는 것인지, 석·박사학위 과정 등 연구에 있어서의 국제 인력을 활용하는 것인지 국제화의 세부 목표는 대학마다 다르다. 일률적이거나 두루뭉술한 국제화를 극복, 개별 대학의 목표를 지속적으로 견지해나가는 게 필요하다.”
- 국내 대학들이 하나같이 AACSB 인증에 얽매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AACSB 인증의 핵심 평가기준에 경영대학의 목표(mission) 설정도 포함되는데, 일률적으로 ‘인증을 위한 인증’에 몰두한다니 놀랍다. 결국 중요한 것은 외부 평가가 아니라, ‘스스로 설정한 목표가 무엇이며 그것을 위해 얼마나 투자하고 노력하는지’라고 생각한다.”
- 대학의 적응력이 떨어진다는 기업의 평가가 많다. 프랑스는 어떤가.
“프랑스 대학 시스템도 ‘상아탑’이란 말처럼 대학과 사회의 괴리가 존재하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 ESSEC의 경우 경영대학이란 점을 십분 활용해 기업과 긴밀히 연계, 기업들이 선호하는 학교로 꼽히고 있다. 기업이 요구하기에 앞서 기업의 수요를 예측해서 이에 적합한 커리큘럼을 만드는 노력이 가장 중요하다.
그 예로 3개월에서 18개월까지 여러 과정의 기업 인턴십을 개설했다. 기업 인사 담당자와 대학간에 구축된 신뢰를 바탕으로 생명과학·부동산·화장품 업계 등과 연계된 16개 트랙을 운영, 다양한 국가와 기업을 넘나드는 살아있는 현장 경험을 쌓도록 도와주고 있다. 대학·기업의 문화를 샌드위치처럼 묶어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 이공계 기피 현상은 프랑스도 다를 바 없을 것 같다.
“그렇다. 프랑스의 공립대에서는 수학이나 공학 등 이공계 기피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에콜 폴리테크닉을 비롯한 그랑제콜을 통해 우수인재의 유실을 피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엘리트 양성구조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우수인재가 꿈을 잃지 않을 수 있도록 뒷받침해주는 역할도 하고 있는 것이다.”
- 서울대·연세대와 복수학위제를 운영 중인데.
“ESSEC이 프랑스에서 우수인재를 양성하는 대학인 만큼, 한국에서도 엘리트를 육성하는 주요대와 관계를 맺고자 했다. 서울대는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이는 지향점이 비슷했고, 연세대는 탁월한 학생·교수간 개인적 지도와 기독교적 배경이 같아 인연을 맺게 됐다. 휴머니즘과 다양성을 겸비한 국제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본다.
한국과 프랑스의 사회경제적 이슈가 동질적이라, 서로의 경영문화를 배우기 쉬운 것도 장점이다. 프랑스 기업들이 최근 국제화에 나선 만큼 한국 인재들이 일하는 기회도 많아질 것이고, 상호교류 범위도 보다 넓어질 것이다.”
<대담=이경탑 부국장, 사진=한명섭 기자, 정리=김봉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