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대학은 학생들이 민주화 투쟁과 급격한 학사 정책의 변화로 몸살을 앓던 시기였다. 정부는 사학 운영쇄신의 기본지침을 발표해 사학 재단과 학교 嚥돛?완전히 분리하고 대학 휴교령을 해제했다. 또 민심수습책으로 7·30 교육개혁 조치를 통한 일련의 대학 정책이 시행돼, 과외수업금지, 전일제수업, 대학 본고사 철폐를 전제로 하는 대학입시 제도의 개혁과 졸업정원제 실시, 정원의 130% 입학, 한국방송통신 대학의 4년제 승격 등을 추진하게 된다.
80년대 또다른 특징은 ‘논쟁의 시대’. 사회구성체 논쟁과 변혁론 논쟁은 ‘운동권’만의 논쟁이 아니라 한국 지성계에 뚜렷한 각인을 남긴 역사적 논쟁으로 볼 수 있다. 혁명, 계급, 민중, 반제 등의 담론이 새롭게 등장했으며, 특히 민족민주운동세력의 실천적 문제 의식과 결합되어 사회의 근본적 총체적 변혁을 지향하는 ‘변혁운동’의 이론적 밑받침이 되어주기도 했다.
90년대는 아직 끝나지 않는 독재와 이로 인한 시대와의 불화에 대응했던 청춘들의 살신투혼으로 시작됐다. 사회 현실의 비리와 모순을 지적하고 개선을 요구했던 이전 대학생들의 뒤를 이 시대 대학생들도 따랐다.
그러나 민초들의 가장 앞에서 가슴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울면서 세상을 움직였던 대학생들의 투쟁도 불과 2~3년이 더 지나서는 아련한 노스탤지어가 됐다. 잔존한 독재세력과의 타협을 통해서나마 92년 문민출신 대통령이 집권에 성공하면서부터 그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때마침 몰락한 소련과 동구의 몰락 이후 ‘탈 이념’과 ‘탈 근대’라는 국적 불명의 사조로 지식계는 아무런 사회적 좌표를 제시하지 못하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 이른바 ‘IMF 환란’으로 불리는 경제 위기가 몰아치고, 휘청이던 경제에 겨우 균형을 잡아나갈 때 쯤엔 중국시장이 아시아 경제의 블랙홀이 돼 모든 산업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경제적 탈출구가 막힌 한국은 차별화된 테크놀러지를 개발에 눈을 돌렸다. 이를 위한 인재개발에는 막대한 교육재원의 추가 투여가 불가피했으나 그럴 여력은 없었다.
이로부터 대학들간 경쟁, 대학내 교수들간 경쟁, 취업시장의 청년 구직자간의 경쟁이 가속화됐다. 정부가 제시하는 ‘교육대계’마다 연대와 협동보다는 경쟁을 통한 효율화만을 강조하고 있다는 아우성이 끊이지 않았지만 자본의 무한경쟁 시대에 접어든 대학은 확실히 국가 경쟁력의 전초기지가 돼 가고 있었다. 학생들은 생존 경쟁에 내몰리면서 비판을 통한 현실의 개선자가 되기보다 추종자가 돼 가는 길을 선택한다. 그들이 젊음을 위무받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미덕은 소비자본주의에 투항하는 길 뿐이었을지 모른다.
안온함에 사로잡혀 권위주의적 대학운영으로 일관하던 대학에 변화의 움직임이 감지되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다.
세계 대학들과 진검 승부를 펼쳐야 하는 대학들에게 더 이상 등록금만으로 ‘회계를 맞추는’ 주먹구구식 대학 운영이 용납되지 않았다. 대학마다 발전을 위한 체질개선을 시도했고, 발전기금을 위해 사업을 벌이고 기부금을 모집하기 위해 발품을 팔기 시작했다. 대학을 사유화하려는 사학재단은 점차 더 많은 견제를 받게 됐다.
교수들도 더 이상 지식 연마를 게을리 할 수 없게 됐고 자신이 학생을 평가하듯 학생의 평가를 받아야 하는 시대가 됐다.
학생들은 전통적인 이념이나 집단에 대한 경도에서 탈피하면서, 개방성을 토대로 세계를 바라보는 자기만의 안목과 통찰력을 획득했다. 이들은 언제나 가족, 학교, 회사라는 조직의 일원이었을 뿐이던 기성세대와 달리 ‘자아’를 더욱 고민하는 감수성을 지닌 세대였다. 인터넷을 통해 세계와 만나고, 학위 없이도 전문가 뺨치는 세계 인식을 갖추기도 했다. 새로운 지식인상의 탄생이 가능해진 것이다.
학계에 만연한 잘못된 관행도 점차 깨지기 시작했다. 대중의 무지라는 조건 위에서 자행되던 일부 교수들의 곡학아세와 지식 폭력은 사이버상에 모든 것이 공표되는 시대의 변화에 맞춰 대중의 감시체제 아래 놓이기 시작했다. 지식인의 ‘언행일치’와 ‘사회적 책임’에 대한 공론장이 형성됨으로써 위선과 기만의 문화가 판치던 지식계에 일대 변화를 몰고 올 조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