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은 '병자수호조약'등 일본의 강요된 개국으로부터 구미열강의 공공연한 세력각축장이 되었던 시대였다.
이 당시 외국의 존재에 대해 사실상 정보가 미흡했던 조정이나 민중들의 삶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갑오경장, 을미사변, 아관파천 등의 사태를 맞아 충격과 당혹감이 팽배했다. 특히 보수와 개화, 친청-친일-친미-친로파 등의 세력 다툼 속에 방향을 잃고 헤매었다.
이런 판국에 외세의존을 청산하고 자유와 평등의 민권을 누림으로써 민족의 독립과 발전을 이룩하려는 운동이 일어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농민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바로 동학이었다. 그것은 한국 최초의 근대적 사회개혁을 지향하는 가장
강력하고도 혁명적인 변화였다. 비록 조정과 외세의 개입에 의해 실패하고말았지만 후일 이 운동의 발전 형태인 천도교회가 보성전문을 경영하게 +되는 것도 하나의 '숙명'이었다.
일본으로부터 을사조약이 강요되던 1905년 이용익에 의해 설립된 보성전문은 바로 이같은 사회 배경 속에서 탄생했다.
이용익은 함북 명천 사람으로 봇짐을 나르는 미천한 출생이었으나 당시 +세도가이던 민영익에 의해 발탁돼 명성황후에 소개되면서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확고한 신임을 얻으면서 황실 내부의 보물을 보존하고 재산을 관리하는 내장원의 책임자가 되는 등 왕실 내 요직에 중용되었다.
그러나 러·일 전쟁의 정치적 역학관계 속에서 중립을 주장한 이용익은 일본에 의해 강제 납치돼 1년여의 기간 동안 본국에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보성전문의 건학 구상은 바로 이런 시기에 탄생된 것이었다. 서양의 근대문명을 30년 전에 도입하고 발전시킨 일본을 직접 관찰하고국권회복의 방향과 의지를 굳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용익은 1905년 1월 귀국하자마자 당시 대보성(大普成)의 교육기관을 소학교에서부터 전문학교까지 체계적으로 설립한다고 밝혔다.
이를 기점으로 이 땅에서는 '민간사학 설립 붐'이 일어 엄주익의 양정의숙을 비롯해 한성법학교나 광성실업학교 등이 생겼으며, 이듬해 명진여학교, 숙명여학교, 중앙학교, 대성학교, 오산학교, 서우사범 등 명문 사학이 잇따라 설립되기도 했다.
그런데 '보성(普成)'이라는 교명은 고종황제가 입궐한 이용익의 교육체계안을 듣고 매우 기뻐하면서 지어준 것으로 전해진다.
당초에는 '보통(普通)'이라는 이름이 물망에 올랐으나 고종이 +{'보(普)'자는 좋으나 통(通)자는 고전에 '成人之美'라는 말도 있고 문왕의 '成人之德'이라는 말도 있으니 대·중·소학을 모두 보성(普成)으로 고쳤으면 좋겠다}는 말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보성전문의 초기 모표와 교기가 대한제국의 황실을 상징한 +李花章(오얏꽃)을 사용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이화(李花)'는 마치 일본의 국화문장이나 프랑스의 백합, 랑카스타의 붉은 장미와 같이 당시 조선 왕조를 상징하는 의미로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고려대 홍일식 전 총장은 이와관련 "당초 보성의 설립 의도는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가 왕립기관으로 설립하려던 의중에서 비롯되었으나 이후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면서 그 꿈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며 "만일 보성이 왕립기관으로 육성되었다면 오늘날의 고려대학과는 큰 차이를 보였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홍총장 재임 시절인 지난 98년 1월 지금의 학생회관 옆에 +지하 2층, 지상 2층 규모로 완공한 4·18기념관(교사자료실, 유공자 전시실, 상설전시실, 소극장)에서도 유래를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보성전문은 이용익이 경영 재원을 맡기로 하여 우선 '전동아어학교'를 빌려 교사를 마련하고 법률, 이재, 농학, 상학, 공학의 5개전문학과를 가진 2년제 전문학교를 창설, 1905년 3월 역사적인 모집 광고를 냈으나
후일 이러한 연유로 학교 경영 자금이 황실재산에서 일부 지출되기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보성전문은 일제 강점기인 1910년에 들어 새 전기를 맞게 되었다.
경술국치로 교주 이종호와 보성중학 교장 노벽린이 해외 망명길에 오르고 +재원 마련에 막연하던 민족사학 육성에 남다른 지원을 아끼지 않던 당시 천도교회에 경영권을 부탁하게 되었기 때문.
의암 손병희에 의해 창도된 천도교회는 당시 민권 운동의 가장 강력한 +보루였다. 10여개의 학교를 운영하던 천도교 총부는 1911년 들어 보전의 +새 경영자가 되면서 학감이던 윤익선이 교장에 임명되고 중학교에는 천도교 총부측의 최린이 교장대리로 임명됐다.
그러나 천도교측은 보성전문을 종교계 학교로 만들려고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일부 미션계 학교처럼 교학의 목적을 자기 교파의 교리에 얽매려 하지 않았다.
이는 후일 3·1 독립 운동에서도 기독교, 불교와 더불어 오직 '보국안민'의 이상으로 원만한 협력을 이루려 했던 것처럼 민족교육의 방침을 세운 보성전문의 기존 방침 그대로 발전하기를 원했던 데에서 비롯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 강점기의 민족교육은 학생들의 항거와 독립운동에따른 일제의 탄압, 여기에 재단 분규와 경영상 이견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이미 중앙학원을 경영하던 인촌 김성수가 1932년 보성전문을 추곡 5천석의 토지 기부 대가로 인수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동아일보를 창간하고 민립대학 건설의 이념을 가졌던 토착자본가 김성수는 학교 인수 당시 이미 한양전문학교라는 교명까지 지어 놓았으나 교명
존속과 직원의 지위 보장을 원하는 구재단의 뜻을 존중해 교명을 해방 후 종합대학 승격전까지 유지했다.
그리고 송현동 교사 6백여평의 보성전문 교지는 그 해 6월 10대 교장에
취임한 김성수가 보성전문 창립 30주년이 되는 1933년 중앙학원을 통해 현 고려대 자리인 안암동 일대 부지 6만2천여평을 매수, 신 교사를 신축함으로써 초석을 다졌다.
일제말 암흑기를 거쳐 해방을 맞은 보성전문은 종합대학으로 승격되는 46년을 기점으로 전반적인 교육제도를 정비하는 한편 김성수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고구려의 기상과 자강자주의 영광을 계승한 '고려(高麗)'로 재탄생해 오늘에 이르렀다.
해방 후 새로 탄생하는 국립 서울대학교에 교명을 빼았길까봐
노심초사했다는 김성수가 바로 고려라는 교명을 정하게 된 지론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이제 우리가 세우는 대학은 반드시 우리나라의 민족을 대표하는 대학이 되어야 하겠고 그러자면 교명도 마땅히 한국사상 국호 중에서 민족사의
꿋꿋한 정통성을 상징하는 것이어야 하겠는데 '朝鮮'이나 '韓國'은 외세에 시달린 상처 때문에 개운치 못하다는 것,
이 '高麗'도 거란·여진·몽고 등의 외침에 시달리긴 했지만 '高句麗'의 +씩씩한 기상과 그 자강 자주의 영광을 계승하였을 뿐 아니라 문화도 찬란하였고, 삼국통일의 위업을 계승한 왕조로서 대고구려의 웅비하는
민족의지를 대표하고 있어 마음에 든다. 거기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외국어
명칭인 'KOREA, COREE'도 고려의 음을 표기한 점에서 우리 민족이 세계에 알려진 대표적 국호이므로 적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