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청준은 누구인가?
1939 전남 장흥 출생
1965 소설 <퇴원>으로 등단
1966 서울대 독문학 학사
1986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전임강사
1995 96년 문학의 해 조직위원회 위원
1998 제2건국 범국민추진위원회 위원(현)
1999 순천대 문예창작학과 석좌교수(현)
1999 한·일문화교류회의 위원(현)
2000 민족문학작가회의 자문위원(현)
□ 작품 : <병신과 머저리> <당신들의 천국> <이어도> <서편제> <잔인한 도시> <축제> <자유의 문> <날개의 집> 등 다수.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21세기문학상 등 수상.
김우종 :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허겁지겁 따라가다가 주저앉고 마는 낙오자도 많습니다. 정보기술, 생명과학, 그리고 국경을 무너뜨려 버린 세계화, 이런 모든 것을 우리는 문명의 발달이라고 말하지요. 그렇지만 발달이란 무엇입니까? “진보하여 완전한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란 사전적 풀이대로 우리는 지금 인류의 꿈이 완전 성취되는 유토피아를 향해서 달리고 있다고 믿어도 좋을까요? 이 선생의 작품세계에 들어가 보면 지금의 상황에 대하여 매우 회의적인 문명비평적 요소가 어느 작가보다도 강한 듯한데.
이청준 : 정보기술이나 생명과학기술 등의 발달은 온 세상을 너무도 빠르게 바꿔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변화를 누가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그 뿐만 아니라 우리 인류를 위해 기여하는 바도 크지요. 대량 첨단정보들은 우리가 몸담던 온갖 많은 삶의 양상을 밝혀주고 있고 생명공학의 발달로 질병퇴치는 물론이고 생명연장으로 무병장수의 큰 소망도 성취되어 가고 있습니다. 삶의 부가가치가 그만큼 증대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같은 인류문명의 발달은 어느 누구도 거스를 수 없겠지요.
그렇지만 지금까지의 역사가 보여줬듯이 어떤 사상이나 정보나 기술이나 거의 모든 것은 우리에게 혜택과 동시에 재앙도 초래하는 긍정과 부정의 양면이 있었습니다. 바닷가의 간척사업은 하나의 예가 되겠지요. 갑자기 넓은 농토가 생기고 대규모의 공장부지가 생기고 거기서 그만큼 많은 부가 창출되니 꿈만 같지요. 그러나 이 때문에 갯벌은 사라지고 적조현상으로 온 바다가 죽는 재앙이 옵니다. 또 간척사업의 청사진을 보면 넓은 농토나 공장부지로 당장 부가 증대되고 잘 사는 세상이 되는 것같지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더구나 이익은 바닷가에서 생업에 종사하던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그 사업시행 주최측에 귀속되기 쉽지요.
이런 면에서 보면 모든 문명의 발달은 그 혜택의 그늘 밑에 재앙의 부정적 요소가 가려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모든 문명발달에는 검증 검색 과정이 필수적이고 그것이 인문학이나 문학이 해야 할 역할이지요. 발달의 앞길을 무조건 가로막자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무엇이 인류의 참된 삶인가 하는 근원적 물음을 던지며 반성의 검색작용을 해나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김우종 : 그렇다면 검색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특히 어떤 문제를 구체적으로 짚어 나가야하겠습니까?
이청준 : 저는 그것이 세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사회적인 측면이죠. 일상생활의 편의향상, 그리고 부의 창출과 증대. 이런 점에서 문명의 발달에 의한 혜택이 일부의 독점으로 귀속되지 않도록 검증 검색이 있어야겠지요. 가령 정보의 공유현상, 누구나 필요한 정보를 함께 공유하면 의식의 평등도 이루어집니다. 의식의 평등은 삶의 평등도 가져옵니다. 그렇지만 지금의 정보전달체계를 보면 정보의 공유는 곧 의식의 획일화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김우종 : 의식의 획일화는 전체주의 국가의 지배자들이 민중의 통제수단으로 가장 좋아하는 것이겠죠?
이청준 : 네. 그리고 의식의 획일화는 사람이나 그 사람의 삶 자체를 그속에 함몰시켜 버리고 말기도 하지요. 이번 월드컵 경기를 봅시다. 거기에는 개인은 없습니다. 개성은 사라지고 있어요. 일본의 미즈노 교수가 이런 질문을 한 걸 봤습니다. 왜 한국 사람은 빨간 셔츠 안 입어도 그걸 용납 못하느냐고. 이런 경우는 개인이나 인간은 집단의식 속에 함몰되고 주인은 월드컵이 된 것이지요. 월드컵 행사자체가 주인이 되고 우리는 그 속에 끌려 들어가 버리고 만 것. 이것은 물론 나쁜 비유이긴 하지만 이런 의식의 획일화, 집단화된 의식이 형성되면 아주 나쁜 것이 될 수 있죠. 나치즘이 바로 그런 것 아닙니까?
김우종 : 그렇지요. 그야말로 대중선동의 위험한 수단이 되면서 우리는 그 속에 함몰되어 헤어나지 못할 수 있겠군요.
이청준 : 네. 그래서 철저하게 검증하는 검증 시스템이 이루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명의 발달로 누구나 많은 정보를 공유하는 것은 좋지만 정보자체는 사람으로 치자면 사람의 육체이지 정신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속에 인간의 정신, 인간의 의식, 인간의 영혼이 균형있게 함께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함께 따르지 않으면 육체는 건강하되 정신이 나가버린 치매환자나 마찬가지가 되지요. 치매환자는 자신은 치매로 인한 공포를 자각하기 어렵지만 이웃과 사회에는 그것이 큰 공포가 됩니다. 지금의 정보의 범람시대가 그처럼 인간의 정신이 영혼이 균형적 발달을 통해 안팎을 이루지 못하면 재앙이 된다는 것입니다.
김우종 : 매우 중요한 문제를 지적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21세기는 IT기술 발달과 보급으로 더욱 정보가 범람하고 또 그것을 누구나 공유한다는 말을 흔히 합니다. 10대 아이들이 미국 펜타곤의 특급비밀에까지 해킹으로 접근해 가기도 하니까요. 그렇지만 정보의 공유는 우리 자신을 기만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정보를 도용당하고 독점당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무지해지는 면도 있습니다. 지난번 서해교전을 비롯해서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모든 군사적 정보도 그렇지 않습니까?
가령 우리 KAL기가 소련 영공에서 격추된 사건을 봐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소련 영공에 들어간 사실을 캄캄하게 모르고 있지만 다른 강대국들은 처음부터 우리의 모든 것을 보고 벌어지는 그 참상을 즐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말입니다. 즉 첨단과학기술이 강대국이나 특정계층에 독점당할 때 그것은 오히려 재앙이라는 사실 말이죠.
이청준 : 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의 세계화라는 것도 인터넷에 의한 정보의 세계화인 셈이고 그만큼 정보를 공유한다는 것이지만 어떤 키(Key) 정보는 어떤 집단이 독점합니다. 그래서 결국 세계화는 약자로서는 종속화를 의미하지요. 그리고 이것은 또 우리의 가까운 사회현상에서도 늘 나타나지요. 주식시장에서 보면 항상 일부 소수가 정보를 선점하고 독점함으로써 다른 경쟁자를 물리치는 비리가 범해지고 있지요. 그래서 금감위 등에 의한 검증이 필요하게 되고 정보는 공정하게 분배되어야겠지요. 그렇지만 21세기 문명발달이 재앙이 아닌 다수에 대한 공정한 혜택이 되려면 그것은 사회적 제도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가치관이 밑받침되어야지요. 여기에 주로 대학의 지식인이 많이 하는 인문학과 우리 문학의 역할이 필요한 것이겠지요.
김우종 : 이런 사회적 문제에 대한 검증과 함께 역사적 반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난 8·15기념일 때 문단의 일각에서는 친일문인에 대한 자기반성의 성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8·15종전이후 반세기가 흘렀기 때문에 의아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도 지난달에 모 대학의 교수연수회에 불려가서 역시 친일문학 문제를 거론했다가 그것이 끝난 후 사석에서 학장으로부터 이상한 질문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이미 지난 일인데 그런 논의가 지금에 와서 왜 필요하냐는 반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좋은 쪽으로만 해석하자면 역사는 항상 미래를 향해서 진보하며 발전해 가는 것이고, 사실 ‘그 친일 시인’도 이미 끝난 과거지사이니까 과거에 매이지 말고 항상 앞을 보고 달리는 것이 생산적이라는 뜻이었겠지요.
이청준 : 우리가 말하는 진보 발전은 모두 역사의 진보, 역사의 발전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모든 역사는 반성과 검증의 대상이라고 봅니다. 끊임없는 반성과 검증, 좋은 역사나 나쁘다는 역사나 모두 반성되고 검증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흔히 우리는 좋은 역사는 되풀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거든요. 그러나 좋은 역사도 되풀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삶의 존재양식, 삶의 조건, 환경 자체가 모두 변하는데 어떻게 과거의 역사가 되풀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역사가 발전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역사는 반성의 양만큼만 발전한다고 봅니다. 아무리 좋은 역사도 반성 검증이 작용하지 않은 이상 발전은 없지요.
김우종 : 흐르다 고여 있는 웅덩이가 되는 셈이군요. 그런데 이 나라엔 나쁜 역사마저도 반성 검증없이 달리자는 불법 난폭운전주의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고 그래서 남들은 반세기전에 즉각 끝낸 것을 우리는 지금도 제대로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역사문제가 아니라도 사람들은 대개 과거를 돌이키고 반성하기 보다는 내일에 대한 믿음을 갖고 달리기에 바쁩니다. 내일이 되면 내년이 되면 10년후가 되면 더 잘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믿음. 그같은 역사의 진보 발달에 대한 믿음을 갖고 살아 나가는 사람들이 많지요. 힘든 삶이 그렇게 만들었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이 선생은 우리가 정말 어렵게 살던 60년대에도 늘 과거를 되돌아보고 있었어요. 지금도 그렇구요. 소설속의 주인공들을 통해서 보여준 것이 모두 그렇습니다. 영화로 더 유명해진 <서편제>의 세계도 그렇지 않습니까? 역사의 진보 발달을 이 선생의 작품 세계와 관련시켜 말씀해 주신다면.
이청준 : 소설속의 그것은 도시적인 것에 비해서 역사적으로는 뒤처져 있다는 과거의 시간속에 있지만 그것은 우리의 고향입니다. 거기에는 어머니가 있고 우리의 정체성이 있고 우리의 근원이 있지요. 그러므로 그것은 버릴 수 없는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버리고 떠납니다. 도시의 정보의 세계가 그런 세계지요. 영혼이 없는 정신이 없이 물질만 범람하는 세계.
그렇지만 그 도시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의 현장입니다. 그래도 나도 도시에서 얼마동안 살아나갑니다. 그러다가 얼마 후면 고향에서 묻혀 가지고 올라온 그것이 모두 소진해 버립니다. 그러면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며 과거와 현재의 양쪽 시간속을 왕복합니다. 소설의 세계는 그런 고향찾기이며 보다 더 인간다운 삶의 정체성을 그 근원을 잃지 않기 위한 반성이겠지요.
김우종 : 그러면 그런 문학의 역할 또는 인문학적 관심의 역할이 얼마큼 지금의 문명발전이라는 것이 지니고 있는 재앙적 측면에 대한 제동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이청준 : 제가 어려서 배울 때에는 윤동주 시인은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의 윤동주는 어떻습니까? 저는 소설 쓰기를 씨뿌리기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파종은 했지만 아직은 열매가 열리지 않은 것. 문학이 그런 것 아닙니까? 작자는 당대에 꽃 피고 열매 맺는 것을 못 보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그럴 때가 오리라는 믿음을 갖습니다. 윤동주의 문학이 지금 그처럼 찬란해졌듯이.
나는 이런 믿음을 종교의 세계에서도 기대하게 됩니다. 오늘의 생명과학이 지닐 수 있는 재앙에 대해서 이들은 가장 비판적입니다. 그리고 늘 미래의 역사에 대한 믿음을 줍니다. 스님·목사·신부들, 아주 부드럽고 환한 미소를 지니고 있지만 그 뒤에는 오랫동안의 너무도 힘든 자기단련의 역사, 무서운 담금질의 역사가 숨겨져 있는 분들, 그들은 늘 이 세상을 믿음을 갖고 지켜보고 있지요. 끊임없는 반성과 검증의 역할을 해내며 미래에 대한 믿음을 주고 씨를 뿌리고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잘 알 수는 없지만 또 많은 사람들이 인류역사가 바른 궤도를 달리도록 힘쓰고 있겠지요. 그런 이상 우리는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믿음을 잃지 않아도 되리라고 봅니다.
김우종 : 오늘 좋은 말씀 참으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