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에게 종종 볼테르를 인용한다. 일방적으로 지식을 주입하는 것보다 선생이 질문하고 학생이 답하는 수업이 더 낫고, 그보다 더 좋은 방식은 학생들이 질문을 던지고 학생들 스스로가 자기 생각을 토해내면서 논쟁하고 답을 찾는 것이란 어쭙잖은 믿음에서다. 한 사람이 책 열 권을 읽는 것보다 열 사람이 한 권의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는 게 효과적인 교육법이라고도 말하지 않는가.
그러려면 강의실을 자유로운 토론의 장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이를 일깨우는데 볼테르가 제 격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더군다나 서로 다른 생각이 대화를 나누지 않을 때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는 건 다름 아닌 힘의 논리다.
토론은 그 자체로도 교육적 가치가 풍부하다. 나와 다른 의견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체득한다. 나와 남의 생각이 어디서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확인함으로써 독선과 아집에 빠져들지 않게 한다. 자기 논리를 설득력 있게 펼치는 과정에서 생각의 폭과 깊이는 더욱 풍부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토론 자체가 곧 목적은 아니다. 토론의 종착역은 어디까지나 진리의 발견에 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뭔가 개운치 않은 구석이 있다. 볼테르가 역설한 것처럼 상반된 생각이 서로 부딪힌다고 해서 진리란 녀석이 언제나 제 발로 찾아오는 것 같지 않아서다. 인디언과 백인이 겪은 갈등의 역사를 되새기자니 이런 의구심은 더욱 증폭된다.
볼테르가 살았을 그 무렵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들은 백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떻게 사람이 땅을 사고 팔고 약탈할 수 있는지. 인디언들의 표상 속에 땅은 인간이 소유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마치 인간이 하늘과 신선한 공기, 청명한 물을 소유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에서다. 인디언들은 이 땅이 인간들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이 땅에 속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지나가는 기차에서 왜 백인들이 뿔소 떼를 향해 총질을 하는지. 총에 맞아 썩어 가는 수 천 마리의 뿔소들을 소리 없이 지켜볼 뿐이었다. 인디언들은 동물에게 일어나는 일이 인간에게도 똑같이 일어난다고 믿었다. 대지에 살아 숨쉬는 모든 사물들은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백인과 인디언의 상반된 생각은 서로 부딪히면서 견고해지지 않았다. 사필귀정으로 이끌려 빛을 발하지도 않았다. 대신 힘센 사람의 말이 진리인양 득세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과연 토론과 논쟁은 진리에 도달하는 유력한 방법일까.
이런 상념도 잠시 잠깐뿐. 나라의 최고 통치권자와 교육의 수장이 직접 나서 ‘대학도 산업’이라고 역설하는 마당에 진리 따위를 고민하기가 왠지 공허하게 다가온다. 대학은 진리의 상아탑이란 명제도 이젠 옛말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