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봄의 주 전령사인 진달래와 개나리는 앙상한 가지에서 곱디고운 꽃을 피워 새잎을 트게 하지만, 벌과 다람쥐의 주 양식원을 제공하는 아카시아나무와 상수리나무류는 가지마다 싱그러운 잎새를 피워 훗날의 향기와 열매를 기다린다.
꽃을 먼저 피운 진달래와 개나리는 아름다운 색채를 과시하면서 벌과 나비를 유혹해 보지만 봄 시샘 추위에 이들은 날개 짓마저도 제대로 할 수 없어 참다운 결실을 맺게 하지 못한다. 반면에 잎새가 푸르럼을 더할 때 진한 향내를 발하는 아카시아꽃과 밤꽃은 뭇 벌과 나비의 향연으로 알찬 결실을 맺는다.
이러한 자연의 이치를 우리의 교수 사회에 비유해 볼 때, 혹자(之花性 교수)는 꽃을 먼저 피우려고 안간 힘을 쓰기도 하고 혹자(之葉性 교수)는 잎을 먼저 가꾸려고 애쓰기도 한다. 양자 모두 나름대로의 노력과 인내를 하면서 일정 기간 학문을 익혀 신임장(학위증)을 획득하고 대학의 문을 두드려 우리 사회 특권계급인 교수가 되었지만, 자신의 나무(학문)에 꽃과 잎을 피우는 시기와 열성은 각자 다르다.
식물에 따라 꽃과 잎이 피는 순서, 모양, 색깔이 다르듯이 학문이라는 나무의 모양과 크기도 사람마다 다르다. “지화성 교수”는 대학 사회에서 자신의 전공이라는 나무에 잎을 발하기도 전에 얕은 잔꾀와 가식적인 명분으로 꽃을 피워 권력과 금력 및 명예를 추종하는가 하면, “지엽성 교수”는 이러한 가식적 명분보다는 오직 자신의 나무에 꾸준히 적당한 거름과 물을 주면서 푸르고 싱싱하게 잎을 가꾸어 참다운 결실을 맺는 데만 몰두하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의 교수 사회에서는 과연 어떤 유형이 바람직한 것일까? 소위 지성인 내지 지식인 집단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교수 사회에서 학문을 신장하고 고양시키는 일은 도외시한 채 이기적이고 가식적인 명분으로 시류에 편승하여 권력과 명예를 쫒는다면 참다운 지성인 혹은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만일 우리의 지성인 집단이 얄팍한 지식으로 현란하고 난해한 수사를 꾸미면서 일반인을 우롱하고, 시류에 따라 목청을 가다듬고, 권력에 눈을 반짝거리면서 부귀공명에 귀를 기울인다면 과연 지성인이라고 혹은 지식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만일 그들이 권세의 명암에 따라 이해득실에 따라 처신을 달리 한다면, 반질반질한 두 눈을 굴리면서 귀를 쫑곳거리고 기회를 엿보며 먹이를 추구하는 노련한 “쥐성인”(다 큰 생쥐)이나 생쥐 같은 지적 속성을 지닌 “쥐식인”의 습성과 크게 무엇이 다를 바가 있는가?
매번 정권교체기를 전후하여 많은 교수들이 갖은 명목으로 실세 가능 정당에 줄을 서고 이 중 몇몇은 고위 공직자로 발탁되는 행운(?)을 얻기도 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이번에도 이변은 없었다. 그들이 내세우는 대의명분은 최고의 지식인으로서 전문지식의 사회 환원 내지 봉사이다. 이름 하여 현실참여 이다.
이런 명분 하에 한편은 권력 실세에 줄을 서는 “정치참여”, 다른 한편은 “권력 저항세력” 혹은 “권력 가능세력”에 줄을 서는 “시민운동”이다. 이들 모두가 전부 “지화성 교수”라고 볼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일부는 그렇다고 볼 수 있다.
만일 당신이 “지화성 교수”에 속할는지 모른다고 생각된다면 꽃을 먼저 피우는 진달래와 개나리의 속성을 잘 이해하고 자성의 기회를 갖길 바란다. 진달래꽃과 개나리꽃은 벌과 나비를 현혹하는 색채만 갖추었지 향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점을 새겨두길 바란다.
친애하는 교수들이여! 그대들이 진정 지성인 혹은 지식인으로 부름받기를 바란다면, “쥐성인” 혹은 “쥐식인”의 습성과 태도를 하루 속히 과감히 버려야 할 것이다. 이런 생쥐 습성을 지닌 일부 교수들로 인하여 교수 집단 전체가 매도된다면 장차 우리 대학의 발전을 위해서도 정말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