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우리의 젊은이들은 무엇을 위해 대학에서 공부하는가? 이러한 질문이 필요한 이유는 학교교육의 목적이 삶의 목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이 질문은 외관상으론 목적론적 색채를 나타내고 있지만 내면적으론 존재론적인 철학적 함의와 실용적인 형이하적 실제성을 포함하고 있다.
먼저 목적론적이라 함은 이 질문이 ‘무엇을 위해’라는 목적을 묻고 있기 때문이다. 삶과 학문에 대한 목적이 사람에 따라 각자 다른 색조를 띄고 있겠지만 누구나 공통적으로 바라는 바는 ‘행복 추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고대 희랍의 위대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모든 사람의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이라고 믿었다. 인간은 행복을 갈망하고, 행복은 유덕한 생활을 신봉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으며, 고매한 덕성은 지혜와 지식을 통하여 가꾸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완전하면서도 자족한 것’ 내지 ‘축복받은 것’으로서 ‘지고(至高)의 선(善)’이라 간주하였다. 전자를 인간이 획득할 수 있는 ‘최고의 행복’ 즉 유다이모니아(eudaimonia)라고 말하고 후자를 절대자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최상의 축복으로서의 행복’인 마카리오스(makarios)로 표현하였다.
이처럼 행복이 ‘최상의 것’이고, 인간은 ‘최상의 것’을 바란다면, 행복은 곧 인간이 바라는 ‘최상의 것’이라는 논법이 성립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무엇을 위해 살고 무엇을 위해 공부해야 하는가에 대한 정답은 ‘행복’을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다.
다음으로 존재론적이라 함은 무엇을 행하는 나(自我)라는 인격체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하는가 라는 물음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케안 윤리학⌟(Nicomachean Ethics)에서 행복을 ‘완전한 덕(德)을 준봉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영적 활동'으로 정의하였듯이, 배우는 사람은 학문을 통하여 자신을 고매한 덕성을 지닌 인격자로 체화시킬 수 있어야만 ‘지고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고대 중국의 철학자인 순자(荀子)도 자아수양을 겸한 예(禮)를 익힘으로써 인간의 미숙하고 사악한 본성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하면서, 특히 현자(賢者)의 가르침을 학습할 것을 강조하였다. 배움을 통하여 덕성이 고매한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 대학에서 공부하는 또 다른 중요한 목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실용적인 형이하적 실제성이라 함은 배움을 통하여 행복과 덕을 추구하기 위함뿐만 아니라, 이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자 과정으로서 의식주의 해결은 물론 돈과 권력, 명예와 지위를 차지하고 나아가 인간으로서 존엄과 향락을 누릴 수 있는 실제적 내지 실용적인 것을 얻고 누리기 위해서 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순자(荀子)에 의하면 사람은 욕망과 함께 태어난다고 한다.
이러한 욕망은 물질적인 소유물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으며, 욕망은 이러한 물질적 만족을 성취하기 위한 원천적인 근원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러한 욕망은 교육과 훈련을 통해 제어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교육은 인간의 물질적 만족을 충족시킬 수 있는 실용적 도구이자 물질적 욕망을 억제시킬 수 있는 도덕적 매체라고 말할 수 있다.
평범한 말 같지만 우리의 젊은이들은 대학에서 실용성을 추구하고 덕성을 갖추며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공부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잠시 커피 한 잔 마시는 시간이라도 할애하여 내가 무엇을 위해 대학에서 공부하는지를 한번쯤 깊이 있게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