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나 무슨 사안이나 찬반은 갈리는 법. 논란거리에는 항시 즉답을 피하고 고개 숙여 책이나 보는 척하는 뻐언한 인간, △취업 △금전 △학문 등 3가지 문제를 가운데 두고 긍정과 부정에 대한 각각의 입장을 들었다. 우리의 뻐언한 인간, 답답하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신비롭기까지 하니 어쩔 수 없는 소수이자 제3세력이다. 고로, 끄트머리에 살짝 한마디씩만 보탰다.
대학, 취업 위한 징검다리일 뿐
‘취업’ 예찬론 ▶ 김영탁군(영남대 기계공4)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실용주의 노선으로 철저하게 무장하는 것이 뭐가 나쁜가. 이 곳은 자본주의 국가다. 남에게 해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신의 이익에 충실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상식이다. 취업의 가부는 곧바로 나의 미래를 좌우한다. 보다 나은 조건과 환경의 일자리를 구하려는 노력은 미리부터 준비해야 한다. 대학 역시 여기에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고급전문 인력 양성은 대학의 고유 책무다. 사회를 향해 보다 양질의 인력풀을 공급해 사회 기여도를 드높여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청년실업난 해소에 대학 또한 아예 두 팔과 두 다리까지 걷어붙이고 나서야 한다.
‘취업’ 비난론 ▶ 오해 말라. 취업을 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취업만이 지상 과제로 상정되다시피 하니 그 부작용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황주성군(광운대 경영4)은 차분하다. 대학이 이제껏 지켜왔던 고유한 역할들, 가령, 사회비판 기능과 학문탐구 등은 이미 내놓기 쑥스럽기까지한 지경이 이르렀다. 학생들은 강의에 집중하기보다는 취업 가능성이 높은 여타의 특별활동에 더 매진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강의는 활력을 잃었고 강의 진행 또한 논리적 토론은 찾아보기 어렵다. 단답식 의견 표출만 존재할 따름이다. 캠퍼스 전반에 개인주의가 만연하고 대학가 특유의 공동체 의식이란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대학의 본분이라는 ‘큰 것’ 또한 한번쯤은 생각해볼 시기다.
fun, 한마디 ▶ 배수아의 소설 <독학자>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나는 생계를 위한 노동에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짓은 하지 않겠지만, 노동이 삶의 수단을 제공해준다는 사실은 분명히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노동에의 집중과 성실이 ‘읽는 사람’으로서의 나를 연마하는 훈련이 됨을 인정하기로 했다.” 한 줄 더. “나의 독서가 어떤 가시적인 성취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닌 오직 그 자체로서 목적인 것처럼 노동 또한 생계라는 원래 이외의 목적을 갖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재테크 하는 게 이상해?
‘돈’ 예찬론 ▶ 돈 예찬자라고 하니까 어감이 안 좋다. 우선 황금만능주의, 뭐 이런 것부터 떠올린다. 그러지 말았음 좋겠다. 상식선에서 이야기하자. 조하연양(서울여대 언론영상4)은 정공법이다. 솔직히 말해 보라. 돈 없이 뭘 할 수 있나? 대다수의 학생들이 등록금 때문에 매 학기 마음고생 하는 것이 사실이다. 아르바이트해서 용돈 정도는 제 손으로 마련해도 좋고. 또 돈이 생겨 등록금에 보탤 수도 있으면 더 좋은 것 아닌가. 재테크란 그런 의미다. 그런데 저축, 적금, 주식, 펀드 이런 것에 언제부터 연령 제한이 생겼나? 대학생은 투표권도 있는 성인이다. 그렇다면 물어보자. 주식은 도대체 몇 살부터 하는 것인가? 어디 법으로 정해놓은 게 있나?
‘돈’ 비판론 ▶ 이개원군(대구대 사법2)도 지지 않겠다는 태세. 돈을 유용하게 쓰는 일을 두고 세상 누가 토를 달겠는가. 다만 학생들의 손에 전공서적이나 교양서를 찾아보기 힘든 세태를 지적하는 것이다. 캠퍼스를 둘러보라. 너나할 것 없이 주식, 부동산 등 실용서가 하나씩 손에 들려 있다. 아줌마들 계모임 하는 것도 아닌데 대학생들의 화젯거리가 돈벌이로 채워진다면, 분명 문제다. 돈 문제에 태연자약 하라는, 구닥다리 같은 소릴 하려는 게 아니다. 돈은 아껴 쓰면 되는 것이다. 돈벌이 혈안이 돼 있다는 소리까지 듣게 된다면, 적어도 대학생이라면 부끄러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fun, 한마디 ▶ 구이로 센지가 쓴 <에곤 실레, 벌거벗은 영혼>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에곤 실레가 한 말이다. “나는 나의 훌륭함이 마음에 든다” 나는 돈 앞에 저렇게 당당하게 자신의 의사를 밝힐 수 있는 사람들이 마음에 든다. 솔직히, 부럽다.
난, 대학교수가 되려는 게, 아냐!
‘학문’ 예찬론 ▶ 이미라양(울산대 국문4)은 조곤조곤 설명한다. 학문이나 지식은 결코 고립된 것이 아니다. 대학은 단과대와 학부, 전공, 학과 등으로 세세히 구분돼 있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촘촘히 연결돼 있다. 교양과목으로 통칭되는 기초 학문이 그 예다. 자신이 선택한 전공과목만을 파고드는 것으로는 배움의 길이 완성될 수 없다. 진리 탐구를 지향하는 끝없는 지적 추구의 과정이 학문으로 가는 길이다. 동시에 학문의 즐거움이다. 인격과 교양, 지능과 상식, 외국 문화에 이해 등등 이 모두가 배움의 과정에서 축적되는 것이다. 대학은 1등들만을 모아놓은 집합소가 아니다. 일류만이 아니라 국민 모두, 더 나아가 인류 모두가 잘 사는 것을 지향하는 집단이어야 한다.
‘학문’ 비판론 ▶ 매년 수능시험 맞춰 신문지상에 오르는 대학 관련 기사 가운데 꼭 빠지지 않는 게 이색학과 소개 기사다. 조남훈군(공주대 식영4)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다. 한때 부동산 바람이 부니까 여기저기서 부동산학과를 만들었다. 대한민국에 복덕방을 몇 개나 만들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심지어 이런 학과도 있다. 두부제조과, 장례지도과, 스포츠당구과, e스포츠게임과, 동물조련이벤트과. ‘학문 탐구’에 관한 한 대학이 먼저 반성해야 한다. ‘100% 취업 보장’ 슬로건을 먼저 내건 것은 대학이다. 그러면서 말로만 ‘진리의 상아탑’ 어쩌고저쩌고. 입만 열면, 학생들이 공부 안 한다, 인문학을 살리자 공염불이나 외고. 대학이 먼저 학문의 길을 포기한 마당에 학생들에게만 학문에 매진하라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fun, 한마디 ▶ 포로수용소 변소에 한 줄 글귀가 적혀있다. ‘이 변소가 처음 본 그대로 깨끗하게 남아 있도록 사용하시오!’ 커트 보네거트 소설 <제5도살장>에 등장하는 장면 가운데 하나. 변소에 적혀있었다는 저 글귀, 지구를 사용하는 동물이라면 누구나 지켜야 할 상식적인 공중도덕이다. ‘학문’할 때는 더더욱 공중도덕이 중요하다.
이승호 객원기자 news@un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