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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모양과 색채
이정규 / 본지 전문위원, 한국교육개발원 연구원, 홍익대 겸임교수
오늘 우연히 해 묵은 서류를 정리하다가 모 학회지 게재응모 논문심사표를 보게 되었다. 벌써 한해 전의 일이 되었지만 당시 그 논문을 읽으면서 한편으로 놀라움과 다른 한편으론 허탈함을 느끼던 기억을 지울 수 없다.

논문심사 의뢰를 요청받고 논문을 받아 본 순간 제목부터 필자가 몇 년 전에 모 학술지에 게재한 논문과 아주 흡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연구주제가 흥미롭다고 느꼈다.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진지하게 정독을 하기 시작했다.

이론적 배경을 기술하고 있는 5쪽에 이르렀을 때 눈에 익은 듯한 글귀들이 보였다. 각주에 첨언하는 것을 실수했겠지 라는 생각을 하며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다음 페이지는 온통 글투가 필자의 것으로 느껴지기에 각주나 후주에 인용표시가 있는 가를 몇 번이고 살펴보았다. 그러나 어떤 인용 글귀도 찾을 수가 없었다.

7쪽에서도 한 단락이 그러했고, 8쪽에서도 그러했다. 다행이랄까 8쪽에서는 각주에 번호를 붙이고 필자의 논문을 인용했다고 한 군데 언급이 되어 있었지만 연도와 통권 번호가 틀려 있었다. 그 다음 페이지부터 요약 및 결론에 이르기까지 그 논문을 읽으면서 필자는 내내 불쾌한 심경을 가라앉히기 어려웠다.

영문 요약에 이르러 또 다시 눈에 익은 문장이 들어왔다. 명백한 표절 행위를 놓고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한 동안 고민에 빠졌던 기억이 선하다.

이론적 배경을 기술하면서 선행연구를 고찰하지 않을 수 없지만 타인의 글을 인용할 때는 직접이든 간접이든 인용방법을 명확히 밝히는 것이 학문하는 사람으로서의 도리이자 선행연구자들에 대한 예의라고 볼 수 있다.

조사(助詞)를 변화시킨다든지 주요한 용어를 조금 다른 뜻의 단어로 바꾼다고 해서 자신의 글이라고 볼 순 없는 것이다. 물론 학문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유(有)에서 다른 유(有)를 만들거나 변형시키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학문의 궁극적 목적이 진리 추구에 있는 만큼 학문의 순수한 본질을 얕은 잔꾀와 요령으로 변질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 즉 흰 우유에다 딸기를 넣어 딸기 우유를 만들 수도 있고, 바나나를 넣어 바나나 우유를 만들 수도 있고, 초콜릿을 넣어 초콜릿 우유를 만들어 맛과 색깔을 약간 달리할 순 있지만 우유라는 본질은 변화시킬 수 없듯이 말이다.

이렇듯 같은 문장을 놓고도 내 글이냐 아니냐는 생각이 같은가 다른가의 문제가 아니라 타인의 글을 보고 그대로 베꼈느냐 일부를 도용했느냐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어차피 학문적 행위란 우리의 선조나 선배들이 이루어 놓은 정신적·물질적 세계의 산물을 놓고 계승 ․ 발전시키는 것이다. 도서관에 키를 훌쩍 넘기며 겹겹이 쌓여 있는 무수한 장서들은 곧 우리 인류의 발자취이자 향기이며, 학문엔 왕도가 없다는 사실을 무언으로 입증해주고 있는 증거물이다.

내 글이라고 자처할 수 있는 것도 엄밀히 따지자면, 다른 사람들의 직․간접적인 유․무형적 실체로부터 모방하거나 차용하면서 ‘내 것’처럼 변형시켜 고착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비근한 예가 될지 모르지만, 우무가사리를 얼마나 오래 동안 삶느냐 그리고 어떤 용기에 담느냐에 따라 묵의 색깔과 모양이 달라지듯이, 글 또한 내가 어떤 생각을 담고 그려내느냐에 따라 색채와 형태가 달라진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설혹 그렇더라도 형태가 다른 그릇을 준비하고 색상이 다른 물질을 준비하여 산물을 만들어 내는 과정만큼은 나 자신의 행위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무릇 학문을 하거나 하고자 하는 사람은 적어도 이런 나 자신만의 행위만은 스스로 할 줄 아는 양식과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마저도 귀찮다든지 하지 않으려 한다면 학문의 길 대신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이 백번 나을 것이다. 적어도 학문을 하는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충실한 도리를 지킴은 물론, 학문의 선배와 동료에 대해 정중한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고 본다. 우리 모두 학문을 어떤 모양으로 만들고 어떤 색채로 칠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자.

한국대학신문 | 입력 : 03-07-24 오전 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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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Thot 학문 뿐만 아니라 개인의 인생에서도 특별한 형태와 색을 만들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003-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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