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독일, 러시아의 강한 반발 때문에 몇 차례 좌절을 맞았던 미국은 결국 네 번의 수정과 동맹국에 대한 물밑설득 작업 끝에 10월 16일 결의안을 관철했다. 두 번째 결의안은 팔레스타인이 초안을 작성해 유엔안보리에 제출한 결의안이다.
이 안은 이스라엘이 건설 중인 팔레스타인 보안장벽을 반대한다는 결의안이었는데 이라크결의안이 통과되기 이틀 전 안보리에 상정되었다가 안보이사회 15개국 중 미국만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져 부결되었다. 유엔안보리는 세계평화와 안전에 관한 가장 최종적인 기구로 안보리결의안은 국제적으로 정통성과 강제력을 가진다.
그만큼 안보리 결의안이 중요하기 때문에 신중한 결정을 유도하고 다수의 횡포를 막기 위해 만들어 놓은 장치가 바로 비토(거부)권이다.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5개국 중 한 나라라도 거부권을 행사하면 부결되는데, 이런 막강한 권한이 안보리상임이사국의 비토권이다.
이라크결의안을 통과시키려고 온갖 회유와 압력 등 노력을 해온 미국이 팔레스타인 인권보호와 관련된 결의안에 대해 가차없이 반대표를 던진 것은 미국이 말하는 인권과 도덕의 이중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공사 중인 예의 보안장벽은 13억 달러 규모의 이스라엘 역사상 최대공사로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를 감시탑과 콘크리트 장벽으로 봉쇄하는 공사이다. 문제는 이 장벽이 이스라엘 정부가 1967년 이스라엘과 아랍지역간 확정된 휴전선인 '그린라인'을 침범하고 있을 뿐 아니라 팔레스타인측 전체 영토의 2%를 빼앗으면서 이스라엘 정착촌을 확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마을 한 가운데로 장벽이 지나가고 있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일터를 잃어버리기도 하고, 장벽 출입구가 몇 개 안되는데다 이마저 이스라엘측이 경비를 서고 있어 팔레스타인인들은 출입도 통제된다. 이렇게 팔레스타인인들을 ‘현대판 만리장성’에 가두어 봉쇄하는 반인권적인 조치인데도 미국은 독불장군으로 국제적인 반대여론에 등을 돌렸던 것이다.
부결된 팔레스타인 보안장벽 반대결의안은 10월 21일 다시 유엔총회에 상정되었다. 총회에서는 이스라엘이 건설 중인 보안장벽 공사 중단을 촉구하는 결의안이 찬성 1백44표, 반대 4표, 기권 12표의 압도적인 표차로 통과됐다. 하지만 유엔총회의 결의에도 불구하고 이 안은 안보리에서 부결되었기에 아무런 강제성을 갖고 있지 않다.
이것이 국제정치의 냉엄한 현실이다. 미국은 테러지원국이나 대량살상무기 수출국으로 추정되는 국가들을 이른바 '불량국가(rogue states)'라는 블랙리스트에 올려놓고 제재를 가하고 있다. 이라크, 이란, 시리아, 북한, 쿠바 등의 국가가 여기에 해당한다.
흔히 국제정치에서는 두 가지의 중요한 권리가 있다고 하는데, 하나는 인권이고 또 하나는 주권이다. 인권과 주권은 서로 대칭적인 권리여서 한쪽을 앞세우면 한쪽이 침해될 소지가 크다. 미국이 인권을 내세우며 개입한 전쟁은 언제나 심각하게 주권을 침해한 전쟁이었다. 코소보 전쟁이 그랬고 이라크전쟁이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세계최강대국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부도덕성과 주권침해에 대한 면책특권을 행사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보안장벽건설이 심각한 인권유린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보안장벽건설 중단을 촉구하는 결의안에 당사국인 이스라엘과 함께 반대표를 던졌다.
말로는 인권과 민주주의를 이야기하지만 행동으로는 정당성이 없는 전쟁을 감행하고, 반인권적인 조치들을 오히려 지원하고 있는 미국의 태도는 이율배반적이다. 이라크 파병결정에 대한 반대여론이 거센 지금, 두 번의 유엔안보리 표결에서 보여준 미국의 태도는 미국이 과연 진정한 인권의 수호자이며 중동평화를 책임질 수 있는 국가인지 의문을 갖게 한다.
바로 이 때문에 미국의 살아있는 양심으로 불리는 노엄 촘스키는 미국자신이야말로 국제사회의 불량국가라고까지 혹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