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편이 아닌 남자와 동침하는 짓인 이른바 서방질을 하는 계집을 사람들은 ‘화냥년’이라고 한다. 이 ‘화냥년’이 생긴 것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병자호란은 1636년(인조 14년) 병자년(丙子年)에서 시작하여 이듬해인 1637년 정축년(丁丑年)에 끝난 오랑캐의 난리로 달리 병정노란(丙丁虜亂)이라고도 한다. 1627년(인조 5년)의 정묘호란(丁卯胡亂)으로 우리나라와 뒤에 청나라가 된 후금(後金)은 형제지국(兄弟之國)의 맹약(盟約)을 맺었으나 그 뒤 후금은 명(明)나리를 치기 위해 우리나라에 군량(軍糧)을 강요하고 병선(兵船)을 요구하는 등의 압력을 가하고 1632년에는 군신(君臣)의 관계를 맺고 세폐(歲幣)를 증가시키도록 요구하였다.
이러한 후금의 강압적 정책은 우리나라에서의 배청열(排淸熱)을 한 층 높게 하였다. 한편 후금의 태종(太宗)은 내몽골을 평정한 뒤 왕의 칭호인 한(汗)을 버리고 황제의 존호(尊號)를 사용하기 위하여 1636년 2월에 용골대(龍骨大), 마태부(馬太夫) 등을 보내어 만주 몽골의 여러 부족장인 패륵(貝勒)들이 청태종에게 올린 존호의 글을 보이면서 우리나라 정부도 이같이 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척화론(斥和論)의 주장에 따라 인조는 청나라 사신을 인견(引見)하지도 않고 국서도 받지 않았다. 물론 조정에는 최명길(崔鳴吉) 같은 주화론자(主和論者)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세는 척화선전(斥和宣戰)의 기운으로 기울어졌으며, 드디어 8도에 선전교서(宣戰敎書)를 내리어 방비를 굳게 하고 적의(敵意)를 보였다. 같은 해 황제의 칭호와 더불어 국호를 청이라고 고친 태종은 조선의 이러한 도전적 태도에 대하여 만주, 몽골, 한인(漢人)으로 구성된 조선 원정군 10만 대군을 친히 거느리고 쳐들어 온 것이 병자호란이다.
청군이 우리나라를 침공한 지 불과 10여 일만에 서울 근교에 육박하자, 조정에서는 급히 회의를 열고 주화론자인 이조판서 최명길 등을 적진에 보내어 시간을 얻는 한 편 두 왕자 봉림대군(鳳林大君)과 인평대군(麟坪大君)을 비롯한 비(妃) 빈(嬪) 종실(宗室)과 남녀 귀족들을 우선 강화로 피난을 가도록 하고 인조는 세자, 백관을 친히 거느리고 뒤를 따르려 하였으나, 이 때는 이미 길이 막혔기 때문에 소현세자(昭顯世子)와 조정 신하를 동반하고 부득이 남한산성으로 피하였다.
그러나 남한산성도 곧 이어 청나라 군대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고 성안에서는 화전(和戰) 양론의 대결이 거듭되더니 척화파인 김상헌(金尙憲) 등의 주장이 꺾이고 주화파 최명길의 주장이 채택되어 마침내 왕은 성문을 열고 왕세자와 함께 송파(松坡) 땅에 있는 삼전도(三田渡)에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청태종에게 항례(降禮)를 드리니 근세사상 처음 겪는 치욕이었다.
이 병란으로 말미암아 재산 피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소현(昭顯), 봉림(鳳林) 두 왕세자와 삼학사(三學士) 등 척화파는 물론 수많은 양민과 부녀자들이 볼모로 끌려가 갖은 치욕과 고통을 당하고 그 곳에서 죽기도 했다.
특히 이 때 청나라 군대인 되놈들에게 전리품으로 끌려갔던 여인들 중 속전(贖錢)을 물거나 도망쳐 고향에 돌아온 여인들을 일컬어 환향녀(還鄕女)라 불렀던 것이다. 이 환향녀가 변해서 오늘날 화냥년이 된 것이다. 당시에 되놈들에게 강제로 끌려간 많은 부녀자들은 그들에게 성적인 굴욕을 당했기로 더럽혀진 몸으로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거나 돌아왔다가 가문의 손상된 명예와 주변의 눈살 때문에 다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비극의 여인들이었다.
옛 어른들은 여인이 싱겁게 웃으면 “웃긴! 되놈한테 업혀갔다 왔나?”하고 곧잘 나무랐다. 우리 옛글 속에는 싱겁고 허튼 웃음을 ‘환녀함소(還女含笑)’라 했다. 여기에서 환녀란 병자, 정묘호란 때 전리품으로 되놈들한테 업혀갔다 돌아온 환향녀다. 돌아온 이 여인들이 오랜만에 만난 부모 형제를 보고 통곡은커녕 야릇한 웃음을 띠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 만남의 희열을 표출하기에는 몸을 버린 데 대한 도덕적 중압이 너무 가혹했기 때문이다. 흔히 자신의 과실을 무력화하려할 때 사람들은 곧잘 웃는다. 길을 가다가 자칫 넘어지면 행인에게 야릇하게 웃음을 지어 보이듯이....그리고 당시 사회는 그녀들를 받아들일 만큼 가문의 명예나 사회의 도덕이 너그럽지 못했다. 그러므로 날이 새기 전에 되돌아가야 할 야릇한 운명이 복합되어 자아낸 웃음이 바로 ‘환녀함소’인 것이다.
이러한 슬픈 역사적 배경을 지닌 환향녀가 그 뒤 정조관념이 희박하여 외간남자와 불륜의 관계를 갖은 여인을 지칭하는 화냥년이라는 말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약주(藥酒)
약주(藥酒)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약으로 쓰는 술’, ‘막걸리보다 좀 맑은, 독한 술의 한 가지’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약주라면 술을 높여 부르는 말로 쓰여지고 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는 막걸리보다 맑고 독하되 소주보다는 약한 청주(淸酒)인 가양주(家釀酒)를 약주라고 불렀던 것인데 지금처럼 술을 높여 부르는 말로 변한 것이다.
이 술을 약주라고 부르게 된 데에는 달성 서씨(達成徐氏) 가문과 관련이 이 있는 숨은 내력이 전해오고 있다.
조선조 중기 호를 약봉(藥峯)이라 한 서성(徐渻 1588-1631)이라는 명신(名臣)이 있었다. 대구(大邱)가 본관(本貫)인 그는 선조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함경북도에서 국경인(鞠敬仁)의 음모로부터 왕자와 재상을 구하여 뒤에 병조좌랑, 경기감사(京畿監事)가 되었다. 광해군 때 김제남(金悌男)의 무고로 11년간 귀양살이를 하고,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다시 벼슬길에 나와 형조․병조의 양 판서를 지냈으며 이괄(李适)의 난과 정묘호란 때 왕을 모셨던 사람이다.
이 약봉에게는 앞을 못 보는 모친 이씨(李氏)가 있었다. 이씨 부인은 시집가던 첫날밤에 신방(新房)에서 신랑 서해(徐嶰)에게 자기가 앞을 못 보는 장님임을 고백했는데, 신랑은 다 이것도 팔자라 생각하고 오히려 부인을 극진히 사랑했을 뿐 아니라 그녀의 손과 발 노릇까지 하여 주었다.
그런데 이 가정에도 불행의 바람이 불어닥쳐 자기를 그처럼 극진히 사랑하던 남편이 일찍 죽게 되었다. 이씨 부인은 남편이 자기가 장님임에도 버리지 않고 극진히 보살펴 주고 사랑하여 준 은혜를 보답하는 길은 아들을 훌륭하게 키우는 것이라 생각하고, 아들의 교육에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그러나 가정 형편이 너무 어려워 생계의 유지마저 어렵게 되었다. 그리하여 할 수 없이 여자의 몸으로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은 것이 바로 술을 집에서 빚어 파는 일이었다.
비록 앞은 볼 수 없지만, 이씨 부인의 솜씨가 남다른 데다 술을 빚는 데 쏟는 정성이 지극하였으므로 술맛은 이내 장안에 퍼져나갔다.
이 이씨 부인이 사는 마을에는 지금의 천주교회가 있는 고개가 있었는데 이 고개 이름이 약현(藥峴)이었기 때문에 술 이름을 약현청주(藥峴淸酒)라 부르게 되었고, 이 약현청주는 소문이 날로 더하여 장안의 명물이 되었다.
그 뒤 점차 이 술의 이름이 약현주라 불리더니 다시 약주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약주는 잘 팔려서 부자가 되자, 그녀는 아들을 위해 독서당(獨書堂)을 차려서 훌륭하게 길러냈다. 그 아들 서성(徐渻)은 드디어 대과(大科)에 급제하고 좌찬성(左贊成)의 벼슬에까지 올랐는데 어머니를 생각하여 스스로 호(號)를 약봉(藥峯)이라 했다. 약주는 이러한 내력을 지니고 그 뒤 면면히 이어져 오늘까지 ‘약주’라는 명성을 지니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