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학술원의 초대원장을 맡은 진덕규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대학 본연의 연구기능 회복과 학문간 경계 허물기를 강조했다. 사회에 대한 대학의 진정한 기여는 충실한 연구와, 기존 학문 연구의 한계를 극복하는 ‘융합학문’으로 그 내용을 채우는 것이라는 설명.
지난달 24일 개원한 이화학술원은 국가·학제간 공동연구를 목표로 지난 2월 설립됐다. 이화여대의 중장기 비전인 ‘글로벌 이화 2010’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그간 학술원 참여 석학들과의 조율 과정을 거쳐 최근 본격 가동에 나섰다.
최고 수준의 학문연구기관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고심한 만큼 학술원 참여 멤버들의 경력이 화려하다. 멤버들이 주축이 돼 운영하는 연구인력만 학술원 산하로 들어온다고 쳐도, 실질적으로 몇 개 연구소가 결집되는 효과를 기대할 만하다.
국내 석학으로는 진덕규 원장을 비롯해 초대 문화부 장관을 역임한 이어령 명예석좌교수, 초대 인권대사 박경서 교수, 저명한 사회역사학자 신용하 교수가 참여했다.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제1호 국가과학자 이서구 교수와 ‘대학민국 최고과학기술인상’ 수상자인 최진호 교수가 가세했다.
초빙 해외석학으로는 2006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유누스 총재와 2005년 노벨화학상 수상자 로버트 그럽스 교수, ‘역사의 종언’ 저자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 침팬지 연구로 이름을 알린 제인 구달 박사 등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
진 원장은 “멤버 간 다양한 의사소통 채널을 열어놓고, 학술원 내부 신진 연구인력과의 학술활동 협력을 통해 학문적 성과 축적에 힘쓸 것”이라며 “일반인이나 학부생·대학원생에게 연구 성과를 환류한다는 측면에서 교양강좌 운영, 해외 석학의 기획강좌 개설 등 학술원 외부와의 소통 노력에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음은 진덕규 원장과의 일문일답.
- 개원을 축하드린다. 대학에 설립되는 학술원은 생소한데.
“학술원은 대학의 전통적 체제에서 벗어난 연구기관이다. 대학에 소속돼 있되, 학부나 대학원과 별도로 존재하는 순수 학문기능 담당기구로 생각하면 된다. 흔히들 학술원을 두고 ‘대학 안에 있되 대학 밖에 있다’고 표현한다.
외국의 경우 대학에 반(半)독립적·준독립적 연구기관이 설립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학술원도 이와 비슷한 개념으로, 대학의 기존 체제나 기구와 약간 다르다는 게 특징이다.”
- 학문 융합·통섭을 강조했다. 정확히 어떤 의미인가.
“학문 간에도 경계가 있어야 할 부분과 경계가 극복돼야 할 부분이 있다. 그간의 우리 학문은 그 경계가 지나치게 강조돼 ‘장벽’이 돼버린 면이 없지 않다. 때문에 다른 학문과의 소통 경로가 없어져, 시대에 뒤떨어지는 학문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이화학술원은 이 분야간 경계의 장벽을 가급적 헐어내자는 취지로 설립됐다. 인문·사회·자연과학 등 여러 분야에 걸친 학술원 멤버 간 의사소통을 확장해, 다양한 학문적 문제의식을 창출하고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것도 학술원의 큰 목표 중 하나이다.”
- 학술원의 성격은 교육보다 순수연구 중심이 될 것으로 보인다.
“맞다. 학술원은 우선적으로 자체 연구활동에 매진할 것이다. 기본 설립 취지가 폭넓고 심도있는 학술활동 증진을 통해 대학 본연의 연구기능을 갖춰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연구의 성과를 젊은 세대에게 전달한다는 맥락에서, 학생 교육도 병행해나갈 계획이다. 학술원 멤버들은 교양강좌를 한학기에 하나씩 맡을 예정이며, 필요하다면 대학원 과정과 협의해 특별 코스를 마련할 수도 있다. 대학원 과정 설치는 아직 구상 단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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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인원 본지 회장(오른쪽)과 대담하고 있는 진 원장. |
- 초빙 해외석학의 면면이 낯익다. 이들은 어떻게 활동할 계획인지.
“학문간·국가간 경계를 극복하는 학문을 추구하고 있는 만큼, 가급적 국내 학술원 멤버들과의 공동연구를 꾸리는 방향으로 추진 중이다. 이외에 1년에 한두차례 국내에 들어와 연속강좌를 진행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국내에서 장기체류하면서 가르치거나 연구하는 개념은 아니다.”
-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학술원 차원의 대책이 있다면.
“융합 학문의 필요성도 이러한 인문학 위기론, 이공계 위기론에서부터 나온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대내외 조건이 있지만, 스스로에 대한 반성과 적실성 있는 학문적 연구 태도의 확립이 선행돼야 할 것이다.
학술원 멤버인 이어령 명예석좌교수께서도 강조한 부분인데, 무조건적 탄식을 넘어서 ‘왜 위기인지’를 정확하게 분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간 자체 토론을 진행, 학문적 연구를 통해 잃어버린 인문학·사회과학의 고지를 재확보하는 것도 우리의 임무 중에 하나라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 민감한 정치적 이슈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연구소가 전무한데.
“학술원은 현실적인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기보다 순수학문에 전념하는 쪽으로 나아갈 것이다. 현실의 정치적 이슈를 ‘외면’해서는 안되겠지만, 우리가 생산한 연구 성과가 원용·응용되는 방향이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인문·사회·자연과학자들까지 포괄하는 학술원의 특성도 고려될 필요가 있다. 창립 멤버인 이서구 교수, 최진호 교수 같은 자연과학자들은 자기 분야에서 이미 큰 독자적 연구소를 갖고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들과 협력해 학문적 성과를 축적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학술원이 추구해야 할 목표이다.”
- 구체적 운영체계는 어떻게 되나.
“석좌교수 밑에 연구교수, 그리고 선임연구원이 있는 형태를 구상하고 있다. 학술원 멤버로 나선 중진 이상의 원로들은 그간의 경험을 내놓고, 실제 연구는 젊은 연구교수와 연구원들 중심으로 진행하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한 연구공간 등 각종 인프라는 이미 마련된 상태다.
각자의 영역에서 진행하던 연구 인력들이 학술원에 모이게 되면 실제로는 몇 개의 대형 연구소가 결집하는 효과가 날 것이다. 공동으로 중장기적인 연구과제를 수행하면서, 동시에 신진 연구 인력의 교육도 자연스제 진행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 학술원 활동이 대학으로선 처음 있는 시도 아닌지.
“다른 곳에서도 이런 시도가 있을 텐데, 보다 경쟁적으로 이뤄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대학의 기본 정신은 연구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요즘 대학들은 교육·사회봉사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면이 없지 않다. 그게 나쁜 것은 아니지만 대학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은 ‘연구’가 가장 크지 않겠나. 이화학술원이 그러한 전환을 앞장서 만들어나가도록 하겠다.”
- 초대원장으로서의 포부와 운영계획은.
“이화여대의 특징은 ‘소리 내지 않으면서 일을 해내는 것’이다. 학술원의 성공적 운영도 지난한 과제이지만, 본 궤도에 올려놓기까지의 기본적인 토대를 늦어도 2년 내에 마련하도록 노력하겠다. 이배용 총장의 구상에 의하면, 파주 연구단지가 조성되면 학술원이 일차적으로 옮겨가 핵심적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학교 차원의 거교적 지원이 큰 힘이다. 개원식에 참석한 인사들도 모두 학장·처장 등 행정 담당자들이다. 어떤 측면에서는 학술원의 성공 여부가 이화여대가 시도하는 또다른 기획의 시금석이 될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학문 흐름을 주도하는 중심기관, 융합학문의 허브로 거듭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진덕규 이화학술원장 약력
- 연세대 정치외교학과(1964) 졸업 및 정치학 박사(1978)
- 이화여대 법정대학장·경영연구소장(1985)
-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소장(1990)
- 방송위원회 영화심의위원장(1994)
- 이화여대 대학원장(1995)
- 현 이화학술원장
- 현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 현 한림대 한림과학원 특임교수
<대담=본지 이인원 회장, 사진=한명섭 기자, 정리=김봉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