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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조선교육심의회 결성과 어문 정책
해방 후 교육계를 지배했던 친일인맥은 민족정의의 심판대로 끌려가기는커녕 미군의 비호 아래 실세로 등장했고 급기야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과서에서마저 해괴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반민족적 친일 행위에 앞장섰던 문인들이 국어교과서에 버젓이 등장해 거룩하게 존경받는 사람들로 둔갑하는 등 다른 나라에서는 결코 예를 볼 수 없었던 해괴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럼 과연 친일 문인들의 논설은 어떤 정도였을까?

원수 英米國의 항공모함을

그대

몽둥이로 내려쳐서 ㅅ개엇는가?

ㅅ개트리며 ㅅ개트리며 자네는 ㅅ개젓는가

壯하도다

우리의 항공사장 마쓰이 히데오여

너로 하여 향기로운 三千里의 山川이여

…(하략) … (서정주 [松井伍長 頌歌])

이것은 미영귀축(米英鬼畜) 들에 의해 소위 [대일본제국]이 결정적으로 망해가던 1944년 서정주가 한국인 가미가제 특공대의 죽음을 찬양한 글의 일부이다. 그 때 일본은 태평양의 레이테섬에서 살아있던 자들까지 자살의 참극을 벌였다. 여기에는 물론 강요된 자살도 많았으며 정신대로 끌려간 한국소녀들까지도 그렇게 희생되었을 것이다.

당시 일본은 이를 두고 옥쇄(玉碎)라고 미화했다. 그리고 이날까지 스스로 한국 청년을 "허우적거리는 나태하고 서글픈 반도의 청년"으로 표현하며 이들을 전쟁터로 몰아내던 시인 서정주(해방 후 문교부 예술과장)는 일본이 망하는 꼴을 보면서 이토록 슬퍼했던 것이다.

이런 친일 문인들이 해방 후 우리 국어교과서에서는 한용운, 이육사 등과 함께 나란히 실리면서 거의 반세기가 흘렀던 것이다.

전두환 정권이 기력을 잃어가던 80년대 후반의 어느 날 나는 한국교육개발원에서 새로 개편되는 국정국어교과서의 마지막 심의에 참여해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심의에 참여해 내용을 보니 몇몇 친일 문인들의 글이 여전히 실려 있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국어 교과서는 민족 교육의 현장입니다. 학생들은 거기 실린 글에 감동하며 우리말 우리 글에 대한 사랑과 함께 필자의 약력까지 달달 외워가며 그들을 존경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친일 문인들은 경력이 감춰진 채로 한용운 이육사 등과 함께 존경받으며 학생들을 기만해 온 것이 아닐까요? 또 그 실상을 아는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진실을 폭로할 때 우리 교육은 무엇이 될까요? "

한국교육개발원에서는 이때 내 주장을 교과서 개편에 반영해 주었다. 거의 반세기가 지난 후에야 수정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국정교과서이므로 지금도 국정 이외의 제2종 국어교재에는 여전히 이들의 글이 실려 있고 그 교재 선택권은 현재 교사들의 몫으로 남아있다.

그럼 과연 이런 일들이 벌어진 배경은 어디에서부터 연유했을까?

○ ○ ○ ○

훗날 논란을 야기한 교과서 개편에는 조선교육심의회 제9분과위원회에 소속된 최현배가 중심에 있었다. 그는 장지연, 조윤제, 피천득 등과 함께 한글교육을 시작했다. 위기에 놓인 민족교육의 한 모서리를 메꿔 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국어교과서는 미군이 진주하던 1945년 9월에 이미 조선어학회 편찬 초등용과 성인용이 출판 배포되었다. 그리고 11월에는 [한글 첫걸음]이나 [국어독본]이 각급 학교에 첫 교과서로 공급되었다. 이것은 우리말 우리글을 되찾게 된 국민에게 매우 큰 해방의 기쁨을 안겨주었다.

그런데 최현배의 성향은 앞에서 언급한 친일 세력과는 이질적이었다. 함흥감옥에서 갓 풀려난 그는 누구 못지 않은 반일인사로 이름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억겸 등 친일 경력자들이 실세가 되고 있는 자리에 왜 처음부터 최현배가 합석하게 되었을까?

해방 후 누가 교육계를 주도하든 빼앗겼던 우리말 우리글을 가르치는 국어교육은 시급한 과업의 하나였다. 그러므로 미군정과 교육위는 누구든 유능한 한글학자를 선택해야 했다. 이 경우 최현배는 한글학자라는 것 외의 다른 두 가지 점에서 특별한 선택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군정은 사실 교육위에 처음부터 친일인사가 많다는 비판을 받고 당혹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비난은 교육위를 구성한 주도 세력 역시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초기 락카드 대위와의 면담에서 깊은 인상을 준 최현배는 그런 의미에서 항일 투옥의 경력 등으로 적어도 그같은 비난을 방어하는 인사가 될 수 있었다.

그가 연희 인맥에 속했던 사실도 보이지 않는 변수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교육위원회의 수장 격인 유억겸을 비롯 교수직에 훗날 총장과 문교부장이 된 백낙준, 고등교육 분과의 백남운 등은 모두 연희 인맥으로 보성전문 출신의 오천석이나 김성수 등과 당시 보이지 않는 경쟁 구도 속에 있었으며, 최현배 등의 참여는 그만큼 연희인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인맥은 미군정 초기부터 보이지 않는 갈등을 빚기 시작해 정부수립 후에는 각료 인선 등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문제가 드러나기도 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최현배는 유억겸 등의 소개로 군정이 시작되던 첫날부터 락카드 대위를 만나고 편수과장에 발탁되면서 교과서 내용을 총괄하는 실질적인 한국측 책임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탓에 그의 역할은 타협적 일면도 보여 친일 문인들의 글이 국어교과서에 실리는 걸 간과했으며, 그 결과 이런 글이 그대로 수록된 채 수십년간을 이어 온 배경이 되었다.

당시 기억되어야 할 또 하나의 정책은 바로 [한글전용]으로 대표되는 어문정책이다.

한글전용은 교육위의 건의 형태로 추진돼 각종 교과서에서 한자어를 극도로 제한하고 가로쓰기를 단행하는 등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정책이었으나 이희승, 남광우 등 국한문 혼용을 주장하는 서울대 학파와 끝없이 대결하는 원인이 되었으며, 오늘날까지 국어교과서나 참고서를 간행하는 출판계의 이권다툼으로까지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양쪽학파의 싸움은 우리말 전용과 국한문혼용의 대결구도로까지 확대돼 오늘에 이르렀다. 물론 양쪽의 대결은 칼자루를 쥔 관이 이겨서 한글전용이 오늘에 이르렀지만 만일 서울대 학파의 도전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말도 많은 한자어를 순우리말로 바꿔 나간 북한과 비슷해졌을 것이다.

최현배의 [우리말본]에서 명사 동사 부사 등 한자어가 이름씨 움직씨 어찌씨 등으로 모두 바뀌어 있듯이 해방 후부터 최현배 계열의 의도대로만 되어 나갔다면 한자어는 물론이고 심지어 '브래지어'도 '젖싸개'로, '노브래지어'는 '알젖'으로, 골프의 '18홀 코스'는 '십팔 구멍 공알 넣기' 등으로 표기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음 호에 계속> 【취재지원=이일형 차장】

한국대학신문 기자 (news@unn.net) | 입력 : 00-03-27 오후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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