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정이 끝나고 새 정부가 수립되면서 안호상 문교부장관은 연희 출신들을 문교부 안에서 몰아내는 작업부터 착수했다. 연희인들을 상대로 칼을 휘두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장관이 이러고도 무사했을까? 지금과 달라서 그때는 이러고도 무사했다. 단 그것은 2년뿐이었다. 2년 후에 그는 장관자리를 연희 쪽에 빼앗기고 아래 자리들도 다시 연희전문이 탈환하기 시작했으며 이런 학맥 싸움은 중학교도 못나온 사람들에게까지 의외로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교육부 파벌의 시발이 된 학맥, 인맥 싸움이 기원이 된 셈이라고나 할까.
한글전용을 주도한 최현배의 경우는 어떤가. 해방 후 교육계 주도세력에는 친일인사가 많았지만 최현배는 달랐다. 함흥감옥에서 죽지 않고 돌아온 그는 학생을 가르치는 교육자로서 또는 한국 제 1의 국어문법학자로서, 그리고 우리 글을 지켜나간 민족주의적 항일 인사로서 국민의 존경을 받을 주요 조건을 골고루 갖춘 인물이었다. 그리고 1929년에 발간된 그의 [우리말본]은 이 나라 국어학사에 길이 빛날 기념비적 업적이었다.
그런데 만일 그가 연희전문이 아닌 경성제대나 보성전문 쪽 인물이었다면 우리 어문정책은 어찌 되었을까?
최현배와 함께 함흥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살아 나온 이희승이 연희 인맥에 속하고 최현배가 경성제대 쪽이었다면 한국 교육계의 유억겸 등 연희인들은 최현배가 아닌 이희승을 그 당시 해방 조국의 국어교육에 끌어들이지는 않았을까?
이희승 역시 한글을 지키다가 투옥된 인물일 뿐만 아니라 3·1 운동 때는 아직 어린 학생인데 등사판으로 유인물을 만들어가며 만세운동에 뛰어들었다가 붙들리고 도망치고 했던 대단한 인물이니까 한글사랑에는 변함이 없었겠지만, 최현배처럼 한자를 원수로 삼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현배 때문에 우리는 한글만을 고집하면서 동양에서는 문화적 쇄국주의의 우를 범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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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연 지연 등이 모두 인맥의 주요 조건이지만 학맥 역시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에서는 대단한 친화력과 결집력의 마술을 부린다.
그런데 이것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세계의 모든 민중이 꼭 같이 동창 좋아하고 핏줄 좋아하고 고향 불알 친구 좋아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일제시대라고 예외는 아니었으니 ….
1943년 여름.
일본 교토에서 시인 윤동주와 함께 검찰로 송치되었던 다른 두사람은 송몽규와 고희욱이었다.
그런데 이들을 담당했던 에지마(江島) 검사는 고희욱을 2개월이나 지난 뒤에야 불러내어 경찰 조서 내용이 사실이냐는 것 외에는 거의 아무런 심문도 하지 않더니 자기가 제 3고교 선배임을 슬쩍 비추고 심문을 끝냈다. 그리고 다음날 고희욱은 석방되었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후쿠오카 형무소로 보내져 옥사했지만 고희욱이 만일 일본 검사와 같은 제 3고 동창이 아니었다면 과연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온갖 잡종들이 모이는 국회의원 선거판과 달리 교육행정을 맡으려면 아무리 모자라도 대학을 나와야한다 그래서 미군정 벽두부터 정부수립 때까지 교육분야의 주도권 형성과정에서는 대학의 학맥이 무시될 수 없었다.
삼균주의를 주장한 임시정부 계열이나 인민대중의 의무교육 등을 주장한 여운형 계열, 남로당 계열들이 모두 배제된 채 한국교육위원회와 조선교육심의회가 교육의 주도권을 잡았지만 그 속에서도 서로 학맥이나 지역감정 따위로 조금씩 갈등이 빚어지기 시작했다.
교육위 멤버들이 조금씩 바뀐 것도 사실은 보성의 김성수와 연희의 유억겸 사이에 보이지 않는 갈등 구도가 빚어졌기 때문이며 이런 학맥의 갈등이 좀더 구체화되고 표면화된 것은 대한민국이 수립되면서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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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8월 15일.
새 정부가 수립되면서 초대 문교부장관에는 안호상이 임명되었다.
그런데 안호상은 자기가 문교부장관에 임명된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라디오 보도를 듣고 달려온 기자들과 제자들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이승만이 당시 그를 문교부장관에 임명한 배경에는 그가 이범석 장군이 이끌던 조선민족청년단의 지도급 인사였고, 한민당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족청 계열인 그를 이범석과 함께 끌어들인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그런데 이승만은 안호상과 아무런 상의도 없이 차관에 문장욱을 임명했다. 손인수의 [한국교육운동사]에 의하면 이때부터 두 사람 사이에서 본격적인 학맥 싸움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내가 장관으로 취임하여 문교부 업무를 파악해 보니 군정시 문교부의 정책과 운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는 것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어요. 그래서 가능한 한 문교부 직원을 새로운 인물로 바꿔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처럼 안호상은 후일 손인수(전 교원대 학장)와의 대화에서 문교부 직원이 거의 연희전문학교 출신들로 이루어진데 대한 강한 불만을 털어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장욱 차관은 8월 16일 지금의 돈화문 안쪽 이왕실 재산관리사무실에서 개청식이 열렸을 때만 잠시 얼굴을 내밀고 그 후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안호상이 비서관을 보내서 등청 거부 이유를 알아봤더니 문장욱은 연희 출신들을 모두 내쫓고 보성전문과 서울대 출신 제자들만 채용하고 있는데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안호상은 서울대 철학과 교수였다. 그리고 문장욱은 연희출신으로서 이미 미 군정청에서 외무처장 등을 지냈던 인물이다. 그렇지만 안호상은 물갈이를 시작한 이유가 단순히 학맥 때문만은 아니었음을 밝히고 있다.
"당시 문교부에는 연전 출신이 많았는데 사무착오가 많고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해임하고 당장 사람이 아쉬우니 보성전문과 서울대 제자들을 데려다 쓸 수밖에 없지 않소"라고.
그리고 문장욱 차관과 직접 다툰 얘기도 털어놓고 있다.
"군정 3년 동안 문교부는 온통 연희전문 출신들에 의해 운영되질 않았소. 그 결과 문교행정이 잘된 게 뭐가 있소?"
이들의 싸음은 문장욱이 이틀 후에 사직서를 제출함으로써 마무리되는 듯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같은 인맥 싸음이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는데 있다.
군정청 때 학무국이 받았던 교과서 용지문제로 안호상 장관이 1950년 5월에 해임되자 후임에 백낙준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교과서 용지문제가 불거지자 그 동안에 연희전문 쪽에서는 얼마나 안호상을 씹었을까?
그리고 백낙준은 누구인가? 그는 해방직후부터 교육위에서 활동했던 연희인맥의 거물이다. 그는 장관이 되자 곧바로 전면적인 물갈이부터 시작했다. 바람이 다시 거꾸로 불기 시작해 안호상 이전의 연희 인맥이 다시 기용되고 일부 이북 출신이 들어섰다.
미군정 때 편수과장이던 한글학자 최현배도 안호상 장관의 임명으로 잠시 물러나더니 이때 다시 편수국장이 되어서 그의 어문정책은 결정적으로 확고한 힘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런데 미군정 3년간 온통 연희전문 출신들만 앉아서 끌어나간 문교 행정이 잘된 게 뭐냐는 안호상의 불만은 물론 인맥에 대한 불만 탓도 있었지만 누가 했더라도 그 혼란기에 미군의 지휘 감독을 받아가며 문교 행정을 했다면 칭찬만 받을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특히 국대안 파동이 그렇다. 군정 초기 연희 인맥이 강할 때 오천석이 제의한 것이라지만 국립대학안은 미군정의 교육정책과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다. 그리고 학교든 언론기관이든 회사든 통페합은 우선 많은 기득권자들의 이해관계가 얽히기 마련이고 여기에 정치적 이데올로기까지 가세해서 불을 지른다면 아무도 그 난리를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군정 시대에 이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국대안 파동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다음 호에 계속> 【취재지원=이일형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