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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국대안 파동의 확산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 계획안(이하 국대안)이 발표되자 흥분하기 시작한 것은 학교만이 아니었다. 사회단체에서도 담화문이나 성명서를 잇따라 발표하며 열렬한 반대운동이 전개되었다.

"조선 교육의 가장 긴급한 당면 과제는 일본 잔재들을 숙청하는 것이오, 민주주의 이념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뭡니까?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갑자기 전문학교를 대학으로 만드는 의도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렵군요. 전문학교 나오면 지체 없이 현장에 뛰어들어 국가 건설에 이바지하는데 이들을 모두 대학으로 만든다는 것은 조선 실정을 모르는 중대한 과오가 아니고 뭡니까?"

국대안 발표 이틀 후에 조선인민당 선전부에서는 이런 취지의 담화문이 나왔다.
내용은 결코 과격하지 않았다. 지금도 4년제 대학 나오면 취직이 안 돼 2년제 전문대를 나오는 학생들이 있듯 현장의 국가건설에 당장 써먹을 수 있는 것이 전문학교인데 왜 아무 준비도 없이 이들을 대학으로 만들려고 하느냐는 조선인민당의 주장은 어느 정도 합리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곧이어 반대의견은 많은 교수와 학생들의 참여와 흥분 속에 전국으로 확대되어갔다.

학원가에는 먼저 경성공업전문학교 재경 학생들의 반대 결의(7.21)가 있었다. 경성공업은 지금의 서울대 공대이며 그때는 서울의 동쪽 변두리 공능동 언덕바지에 자리잡고 있었다.
오천석 문교차장은 종합대학이 되면 한 교수가 여러 대학에 나갈 수 있으니까 교수 부족 사태도 해결되고 교사도 함께 쓰니까 시설부족도 해결된다고 했지만 그것은 천지 사방으로 흩어져 있는 대학 실정을 무시한 일이었다. 이는 당시 국대안으로 통폐합 대상이 된 학교들의 경우 경성대학은 동숭동, 법학전문은 청량리, 경성사범은 을지로, 경성여자사범은 경운동, 경제전문은 종암동, 치과의학전문은 북창동, 의학전문은 소격동, 고등농림전문은 수원에 각기 산재해 있었던 데에서도 나타난다.

물론 수원 농대의 교양 국어 강사가 아침에 출발하여 동숭동 문리대까지 오후 늦게 강의를 나오기도 했지만 그것은 서울에 있는 학생들이 보기에도 좀 딱했다. 물론 지금도 서울에서 수원보다 더 멀고 먼 경상도 전라도까지 내려가는 불쌍한 사람들이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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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공전의 반대 성명을 시작으로 경성대학 의학부 학생(7.23), 경성대학 이공학부 직원회(7.29), 전문대학 교수단 연합회, 조선교육자협회(7.31) 등 교수 직원 학생들의 반대 성명은 끝없이 이어졌다.

당시 국대안에 우호적이던 동아일보는 각계 여론을 취합한 결과를 7월 23일자로 보도했는데 이학송(세브란스 의대 교수), 명원식(국민후생협회), 조동식(동덕교녀 교장), 박명진(경성치의전 교장), 송금선(덕성고녀 교장), 황신덕(중앙고녀 교장), 임숙재(숙명고녀 교장) 등은 찬성의견을, 이종국(조선학술원), 허영호(동국대 학장), 이치규(휘문중 교무주임), 현상윤(고려대 학장), 허현(국립화학연구소) 등은 반대를 나타냈으며, 정인보(조선어학회), 신봉조(이화고녀 교장), 이법용(경성여의전 교수) 등은 입장을 유보하는 등 서로 엇갈렸다.

그러나 여론을 주도해 나가는 언론매체들이 자주 그렇듯이 이 경우에도 공정성이 떨어져 있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직접적인 이해당사자들은 대다수가 제외된 채 타인들에게만 질문을 던진 꼴이었기 때문이다. 경성대 의학부와 경성의학전문을 한데 묶어 놓으면 당장 학교장이나 의학부장 자리 하나가 떨어져 나가고 그 이하 여러 감투들도 사라진다. 그만큼 그 동안의 기득권을 빼앗기는 것이다. 남북통일이 되면 김대중이든 김정일이든 한쪽의 최고직은 없어져야 하고 장관자리도 두 개중 하나는 없애버리게 된다. 이는 마치 동생이 생기면 언니가 엄마 젖을 빼앗기기 때문에 두 살짜리 어린 아기도 불평이 생기는 경우와 꼭 같다. 불평불만이 어디 이뿐이랴 !

그런데 통폐합이 당사자들에게 얼마나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될지는 묻지 않고 강 건너 불 보듯 구경할 위치에 있는 덕성고녀나 중앙고녀, 숙명고녀 교장 등에게나 의견을 들으며 이를 다수의 사회적 의견처럼 내 놓은 것은 잘못이다.

그뿐만 아니라 학교장들은 학교운영이라는 구실 하에 일제시대에는 친일에 앞장섰던 경우도 많았고 대개는 친여적인 성향이 많았으므로 그들에게서 진정한 비판적 의견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므로 당시의 동아일보 여론 보도는 국민 다수 또는 교육계 다수의 진정한 여론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어쨌든 문교부는 일부 찬성과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8월 22일 미군정청의 군정법령으로 국대법을 확정 공포하고 총장부터 임명했다. 그래서 발표된 서울대학교 초대 총장이 엔스태드(Harry B. Ansted)였다. 그는 이미 경성대 총장을 맡았던 인물이며 미군으로서의 병과와 계급은 해군에서 군목을 맡았던 중위였다가 후에 대위가 된 사람이다.

그리고 뒤이어 교무처장에는 연희전문의 언더우드(Horace N. Underwood)를 임명한 것을 비롯 윤일선 경성대 의학부장을 대학원장에, 이태규 경성대 이공학부장을 문리대 학장에, 고병국 경성대 법문학부 교수를 법대학장에 임명하는 등 국립 서울대학교의 토대를 이루게 된 대학원장과 각 단과대 학장 및 3처 1국 9과의 대학본부 체제를 출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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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별을 몇백개 달아도 군인은 군인일 뿐이야. 그런데 겨우 밥풀때기 두개 단 해군 대위가 뭘 안다고 대학 총장이야?"

이는 우리 민족은 물론 교수와 학생의 학문적 자존심에 대한 중대한 모독으로 여겨졌다.
훗날 국대안 반대운동의 주동자들은 모두 빨갱이였다고 인식되고 있지만 빨갱이 아니라 빨갱이 할애비들이 했다고 하더라도 그런 이유 때문에 국대안 반대가 모두 빨갱이 짓으로만 매도될 수는 없는 일이다. 국대안 반대를 누가 했든 새파랗게 젊은 미군 대위를 총장으로 앉혀놓고 쟁쟁한 유학파 또는 국내파 유명교수들을 그 앞에서 굽신거리게 한 처사는 어디까지나 오만한 점령군의 횡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법학박사 학위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는 교육 행정가도 아니며 "자 기도합시다" 하는 것 말고 뭘 잘했나 ?

한국 사정에도 캄캄했고 또 이것은 미군정시기니까 부득이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군정시기였다는 것이 이를 정당화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애초부터 목숨걸고 항일운동까지 해가며 일제의 억압에 원한이 사무쳐 있던 한국인을 일본과 똑같은 적으로 간주하고 점령 지배하려한 군정 통치의 발상 자체가 무지몽매의 소치인 동시에 인류사회 정의를 배반한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다. 미국으로서 그런 군정 자체가 필요했다 하더라도 문교부 행정기관이나 미군이 맡았으면 그만이지 학문연구와 교육만을 하는 종합대학 지붕 꼭대기에 엔스태드 군목이 들어앉아서 뭘 어쩌겠다는 것이었나? 십자가 대신으로 꼭대기에 올라앉았던가?

그러므로 국대안 자체만은 찬성과 반대로 얼마든지 이론이 분분할 수 있었더라도 여기에 미군 대위를 총장으로 앉혀놓은 것은 교수나 학생들 누구나 대개는 복장이 터져서 견딜 수 없을 만큼 미국측이 스스로 불을 질러 놓은 것이다.

교무처장을 미국인으로 임명한 것도 그렇다. 대학원장이나 학장들은 물론 교무처장보다 명예로운 자리지만 대학 행정의 실권은 교무처장에게 집중되는 법이다. 그러므로 대학운영의 최종 권한에서 한국인들은 역시 제외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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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교부의 이같은 강행은 그후 조선공산당과 연관된 좌익계열 교수와 학생, 그리고 일부 민족 진영 교수와 학생이 가세하면서 조직적인 저항을 촉발해 전국 단위의 동맹 휴학과 교원 총 사퇴 및 이에 대응한 문교부의 휴교령 등 악순환을 몰고 와 이후 1년여에 걸쳐 학원가를 극도의 혼란에 빠뜨렸다.

특히 47년 2월 국대안 시행 두 번째 개강을 앞두고 학원가는 극심한 저항을 보여 서울대 각 단과대가 동맹휴업에 들어간 것을 비롯 연희대, 한양공대, 동국대, 국학대 등 서울 시내 주요 대학과 경기상업, 경북중, 덕수 상업, 동명고녀, 동성 중학 등 중·고교는 물론 인천 대구 개성 춘천 등 전국 57개교에서 5만여명이 동맹휴업에 가담했다.
교수들도 서울대 상대, 법대, 공대 교수단의 반대 성명과 사임 결의가 잇따랐다. 사회단체 대표로 구성된 [국대안 대책협의회]도 국대안 철회 요청을 냈다.

그런데 이같은 국대안 반대운동은 각 학교 교수와 학생과 사회단체들이 발표한 성명서 등의 내용 분석만으로는 그 본질이 이해되지 않는다.
경성의학부 학생들이 신입생들까지 모두 나서서 궐기대회를 갖고 직원들은 몽땅 총 사퇴를 결의하는가 하면 광산전문의 교수들도 총 사퇴를 결의하고 학생들은 모두 나서서 성명서 발표에 만세삼창을 하며 문교부를 매도했다.
이밖에 이 기간 중 법학전문, 여자사범, 경성대 이공학부 등 반대운동에 나서지 않는 전문학교와 대학은 한 군데도 없었다. 총 사퇴 결의 성명이 그렇게 많았던 것은 그만큼 이 반대운동이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근본적 성격을 띄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같은 극한적 반대를 무릅쓰고 굳이 문교 당국이 이를 밀어붙였던 이유는 무엇일까?
엔스테드 총장은 47년 10월 25일에 결국 한국인으로 교체되었는데 이런 요구조건들만 해결되면 국대안의 큰 틀 자체가 동의를 얻고 잠잠해질 수 있었을까?
국대안은 처음부터 미국측 발상에서 비롯됐다. 오천석 문교차장만이 아니라 일본의 도쿄대와 같은 큰 종합대학 하나를 갖는 것이 우리 교육계 지도자들의 큰 소망이었다고 하더라도 군정초기부터 국대안은 통제 수단을 효율화하기 위한 미국의 복안이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국대안이 미국측 발상인 이상(한국인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바꿔 말해서 미국측 이익과 일치되지 않는 어떤 것도 허용되지 않으며 모든 것은 미군점령 목적과 일치해야 하는 이상 우리는 그 카테고리 안에서 국대안의 목적을 생각하지 않으면 않된다. 이렇게 본다면 국대안 반대 운동은 그 순수 목적 외에 정치적 목적이 초기단계부터 알게 모르게 숨겨져 이중적 구조를 지니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된다. 그리고 배후에 감춰져 있던 정치적 목적은 곧 표면으로 노출되기 시작했다. 훗날 더욱 확실한 증거로 드러난 것이 소련의 남로당 지령문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취재지원=이일형 차장】
한국대학신문 기자 (news@unn.net) | 입력 : 00-04-17 오전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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