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국대안 파동의 분수령 된 소련 비밀 지령문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을 둘러싸고 벌어진 찬·반 논쟁은 1947년 2월 대학가 개강을 앞두고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47년 1월 30일 문교부와 서울대학 당국은 46년 12월 18일을 기해 서울대 상대, 법대, 문리과대학에 내려진 휴교령을 해제함과 아울러 2월 3일까지 등교하지 않으면 모두 제명 처분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발표 다음날 학생들은 서울대 문리대 강당에서 학생총회를 열고 ▲미국인 총장 사직▲문교 당국자의 인책 사직 ▲경찰 간섭 절대 불가 등을 결의한 후 개학이 되더라도 동맹휴학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들의 동맹휴학 결의는 2월 3일 개강을 맞아 서울대 각 단과대학으로 확산됐으며, 연희대, 한양공대, 동국대, 국학대 등 서울 시내 주요 대학과 경기상업, 경북중, 덕수상업, 동명고녀, 동성중학 등 중·고교까지 동맹휴학 열기가 빠르게 확산되어갔다.
이 기간 중 교수들도 서울대 상대, 법대, 공대 교수단의 반대 성명과 사임 결의가 이어졌으며 서울대 사범대교수 35명 중 25명은 더 이상 문교당국에 협력을 못하겠다는 성명을 내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같은 와중에도 서울대 일각에서는 학원 정상화를 모색하는 [건설학생회]가 조직됐다. 채문식, 김재순, 임원택, 이인세, 엄규진, 계훈제 등을 주축으로 한 건설학생회는 2월 9일 결성대회를 갖고 중단한 학업을 계속한다는 원칙 속에 결의문과 성명서를 문교부와 각 대학에 보냈다. 건설학생회는 우익(민족)진영으로 대변되는 이철승(현 자유민주민족회의 상임의장)이 이끄는 [전국학생총연맹(전국학련)]의 지원 속에 서울대 사수를 결의했다.
국대안의 정당성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초기 찬반 논쟁이 점차 해방 공간의 정치적 역학관계와 맞물리면서 학원가에 본격적인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을 가져왔던 것이다. 여기에 소련의 비밀 지령문으로 알려진 한 장의 문서가 일반에 공개됨으로써 국대안의 쟁점은 그간 학원 민주화와 자주성 회복 차원에서 이념 분쟁으로 급격히 확대되었다. 그리고 이 비밀 문서는 남로당을 중심으로 한 좌익 세력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주면서 국대안 반대 명분을 위축시키는 분수령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숨가쁘게 돌아가는 해방 공간에서 역사적 의미를 지닌 이 비밀 문서의 공개 과정은 한 돌발적인 사건으로부터 처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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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2월 13일.
이날 서울 중앙 예배당에서는 이철승을 비롯한 [전국학련] 맴버와 학생등 1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대 건설학생회] 주최로 '맹휴 진상 폭로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여기에 갑자기 김두한이 나타나 이철승을 조용히 찾았다.
일제 때는 주먹계 대부로 일반에 더 잘 알려졌지만 김두한은 당시 유진산이 이끄는 대한민청의 감찰부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이철승과는 거의 매일 연락을 취하고 있는 사이였다. 그런데 이날 방문은 예정에 없던 것으로 특히 이날 김두한이 불쑥 내민 한 장의 종이 쪽지를 보고 이철승은 아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 이북에서 북로당의 소련군 교육담당 니콜라이 그즈노프가 허헌의 집에 지령문을 보냈는데 그것을 가져왔소"
이 문서는 서두가 '남조선노동당위원장 허헌(許憲) 귀하'로 시작하는 소련의 비밀 지령문이었다.
{ 남조선노동당위원장 허헌(許憲) 귀하
(1) 세계 최대 강국인 소비에트 연방의 외무위원 몰로포트 동지와 영 불 미 등 세계 4대 강국의 외상들은 장차 소비에트 연방의 수도 모스크바에서 전 세계 약소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회의를 열게 되었습니다. 1945년 12월에 모스크바에서 개최되었던 3국 외상회의에서 채택된 조선의 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보장하는 진보적 결정을 남조선 친일파, 파시스트, 반민족자의 두목 김구, 이승만의 반동 테러단들이 맹렬히 반대하고 또 이것을 남조선의 반동 군정이 선동 조장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소 미 공동위원회는 결렬되고 말았습니다.
(2) 붉은 군대의 입장을 유리하게 하기 위하여 남조선 인민들은 남조선 노동당의 계획 밑에서 광범위의 혁명을 일으킬 임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3) 1946년 10월 있던 남조선 인민들의 광범위한 운동은 침략적 제국주의자 미군정의 반동성을 전 세계 인민에게 인식시키고, 이와 반대로 북조선에 주둔한 붉은 군대가 완수한 민주과업의 위대성을 전 세계에 자랑하는 효과 있는 결과로 되었습니다.
다음에 기록된 종합적 계획서에 의하여 남조선에 있는 전 학교에서는 광범위한 조직적이고 맹렬한 투쟁을, 제 1차로 동맹 휴학을 합법적으로 시작하여야 됩니다.
1947년 1월 2일.
니콜라이 그즈노프 소좌. }
그간 남로당이 소련의 사주를 받아 좌익계열 학생들과 교수들을 동원해 국대안 반대 맹휴 책동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한 이철승으로서는 이보다 더 확실한 물증이 없다는 것을 곧 깨달으면서 이 지령문이 가져올 파급 효과에 대해 생각했다.
"이것을 어떻게 입수했소?"
"어제 저녁 남로당 허헌의 집을 습격해서 찾아낸 것이오"
이철승의 물음에 김두한은 대회장을 가리키며, "이것을 폭로하면 놈들이 꼼짝 못할 것 아니오?"라고 말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대회장에서 이 문건을 폭로하기로 합의하고 이철승이 먼저 대회장에 입장했다.
그리고 문리대생 박용만의 개회사에 이어 최성의 맹휴 실상 보고와 백운길의 폭로 강연 등 어느 정도 회의가 진행될 무렵 청년단원과 방청석에 있던 김두한이 발언권을 얻어 사회석으로 올라갔다.
대회장은 느닷없는 김두한의 출현에 한편으로는 의아해 하면서도 호기심 어린 눈빛과 긴장된 분위기가 공존했다.
"내가 어제 남로당 허헌의 집을 습격해 뒤졌더니, 소련 군정당국이 보낸 비밀 문서가 있길래 찾아 가지고 왔소"
김두한은 자신이 입수했다는 소련 비밀 지령문을 높이 흔들어 보이며 대중 앞에서 힘차게 읽어 나갔다.
그리고 "이 지령문은 러시아어와 한글로 씌어 있는데, 소련 사람의 사인이 있는 것을 보니 틀림없는 원본"이라며 마지막 단락에 대한 부연 설명으로 "이 지령문은 국대안 반대를 위해 남조선에 있는 모든 학교에서는 조직적으로 투쟁을 전개할 것을 명령하고, 혁명적 투쟁의 제1단계로 합법적인 맹휴에 돌입해야 한다고 씌어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장내는 삽시간에 소련 규탄 대회장으로 변해버렸다. 참석자들은 모두 "와 -"하고 일어나 "국대안 반대는 남로당의 독자적인 행동이 아니라 소련의 지령에 의한 망동이다"고 외치기 시작했다.
이철승은 당시 상황에 대해 "소련의 지령문을 폭로한 효과는 예상대로 100% 적중했습니다. 나로서는 당시 그 내용의 진부를 확실히 가릴 수는 없었지만 이것이 소위 국대안 반대 저지 투쟁을 하는 우리들에게 백만의 원군이 됐어요"라고 회고하고 있다.
그리고 이 돌발적인 사건은 실제로 그간 학원가에서 일부 좌익세력에 동조하던 학생들이나 추종세력들이 '동맹 휴학이 소련의 사주에 의한 남로당의 책동'이라는 사실에 분개하면서 점차 좌익 세력과 멀어지는 계기로 작용했다. 당시 우익 진영에 있던 [대동신문]의 최중하도 '니콜라이 소련 교육국장이 국대안 반대를 지령했다'는 내용의 폭로기사를 써 민족에 대한 자주성 침해라는 측면에서 좌익 세력에 도덕적인 치명타를 날렸다. 그리고 이 사건은 국대안 반대가 '소련의 사주에 의한 좌익들의 불순한 책동'으로 간주되면서 미군정청이 좌익 세력의 검거에 본격적으로 나서는 계기로 활용됐다.
그런데 본지 대학비사팀의 집중 조사 결과 그간 학계에서도 정설로 간주되어온 당시 소련의 남로당 비밀 지령문은 우익진영에 의해 조작됐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당시 남로당 지하 총책을 역임했던 박갑동이 지난 98년 12월 분단 후 처음 가진 이철승과의 대담에서도 부분적으로 드러난다.
"지령이 내려왔다는 얘긴데…. 소련의 지령이 어찌 허헌의 집에 있을 수 있습니까? 남북의 기밀선은 박헌영에게 있었고 박헌영의 월북 후에는 남로당이 기밀 연락을 소련이나 김일성으로부터 직접 받았던 것이 아니라 북한에 있던 박헌영이 남로당 해주 연락소에서 서울의 김삼룡에게 전달하고 있었습니다. 또 지령은 독특한 암호로 되어있어 다른 사람들이 봐도 무엇인지 모르게 되어 있었어요"
이와 관련 이철승은 최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김두한이 가져온 소련의 비밀 지령문이 가짜였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고 증언했다.
이철승은 그러나 당시 상황에 대해 "이 문건을 김두한이 직접 만든 것인지 아니면 다른 우익 인사가 만든 것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설사 가짜문서라 하더라도 당시 국대안 반대 운동을 위해 남로당이 조직적으로 학원에 개입했던 것은 사실" 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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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비밀 지령문이 사실로 받아들여진 것은 허헌이 남한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46년 초여름부터 좌익진영은 박헌영 체포령 등과 함께 우익진영에게 밀려 월북행렬이 이어졌지만 허헌은 그래도 남한에서 신분이 무사했다.
해방 직후의 공산당 활동은 주로 박헌영이 이끌던 조선공산당이 주도했다. 그러다가 연희전문의 백남운이 이끌던 신민당과 여운형이 이끌던 인민당과의 합당으로 남조선 노동당이 되고 허헌이 위원장이 되었다.
해방 직후 교육계 위원의 하나였던 백남운은 이때 남로당에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그 후 월북해서 북한 정부의 교육상에까지 올랐다. 여운형 역시 공산주의자이기보다는 민족의 양극화를 막으려는 중도파였기 때문에 남로당에 가담하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다가 여운형은 암살되고 박헌영은 46년 여름에 죽은 송장으로 위장하여 상여를 타고 월북했기 때문에 남한에서의 학생 선동 지령은 남쪽에 있던 허헌이 받은 것처럼 되어있다. 그렇지만 박헌영은 체포령이 내려져 월북했더라도 여전히 남한에서의 모든 실제적인 활동을 북쪽에서 지휘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지령문에는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 문제와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문제가 언급되어 있고 학생운동은 이같은 '이승만의 반동 테러단', '남조선의 반정 군정'에 맞서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내용도 있어 국대안 반대 운동과 소련의 적화전략과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믿는 사람도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신탁통치안이 이미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20일에 미국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이다. 그때 미 극동국장 빈센트는 '한국인은 독립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5년간의 신탁통치안을 내놓았다. 석달 후인 45년 12월 16일 미·영·소 3국 외상이 모스크바에서 체결한 신탁통치안은 바로 이 빈센트 극동국장의 안이었다.
그러므로 빈센트 발언 닷세 후 10월 25일에 조선공산당 김삼룡이 "모욕적인 탁치는 단연 취소하는 것이 민족적 염원"이라며 반탁의 뜻을 밝힌 때부터 각종 정당이나 사회단체에 이어 학생들이 첨예하게 찬·반탁의 대립을 계속한 배후에는 결국 미국과 소련이 있었다.
소련의 지령문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 동안에 미·소의 행동. 즉 38선 분할안을 미국이 만든 후 소련이 그대로 따랐듯이 신탁통치안도 그렇게 그들이 우리 땅을 마음대로 짓밟는 냉전 구도 속에서 우리들을 희생시켜 나간 것이다. 그리고 학생들은 그 같은 미소 양국의 이권다툼이라는 큰 구도 속에서 서로 피까지 흘려가며 극한적 좌우 대결을 거듭해 나감으로써, 결국 그들이 내준 무기로 그들을 위한 대리전쟁을 치르며 형제끼리 싸운 바보 민족이 되었던 셈이다.
<다음 호에 계속> 【취재지원=이일형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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