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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반탁학련'과 '학통' 그리고 귀국선
무덥던 한 여름이 다 가고 새해가 되었다. 해방이 되고 처음으로 맞는 새해였다.
그런데 새해를 맞아도 아이들에게 꼬까옷이나 꼬까신 신키고, 떡 해 먹고 윷판 벌이고 널뛰기하며 즐거워하는 집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럴만한 여유를 가진 집도 드물었지만 특히 이 무렵에는 식량난이 극도에 달했었기 때문이다.
일제시대에는 배급제도가 있었지만 해방 직전까지는 말 그대로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는 집도 많았고 특히 도시의 식량난이 더 심했다. 시골에선 그나마 농사지으면서 몰래 감춰둔 식량이라도 조금은 있었으니까.

새해를 맞으면서 더욱 우울했던 것은 배고픔만이 아니었다.
해방되던 날만 해도 당장 독립이 되는 줄만 알고 좋아했지만 국토가 두 쪽으로 나뉘고, 38선을 넘으면서 소련놈들한테 총 맞아 죽는 일까지 벌어지더니, 마침내 모스크바에서 미·영·소 세 나라의 외상들이 모여 5년 동안 신탁통치를 한 후에나 독립을 시켜준다는 소식이 12월 28일 외신을 타고 국내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신탁통치 찬·반을 놓고 벌어진 논란은 아직도 해석이 구구하지만 5년간 기다리면 과연 그 다음에는 독립이 보장되었던 것이었을까?
강대국들 마음대로 하는 일이니까 5년 후에 어찌 되는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또 독립을 허용한다해도 38선으로 갈라놓고 남 북 따로 따로 양극화된 이념교육과 제도를 5년간 시행한 후의 독립국가가 어떤 것이 되는 것인지 누가 알 수 있으랴?

어쨌든 신탁통치는 독립이 물 건너 가 버린 것으로 이해돼 좌·우익을 막론하고 정당 사회단체들까지 나서 일제히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그런데 그로부터 며칠 후 박헌영의 좌익 쪽은 갑자기 반탁에서 찬탁으로 돌면서 좌우익의 이념 논쟁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이어 1월 7일에는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대규모 학생 시위가 우익진영에서 개최되었다.

○ ○ ○ ○

"엄마 밥 좀 빨리 줘, 늦으면 야단 맞는단 말야."
"아니, 겨울방학인데 왜 학교에 나간다고 야단이냐, 안 가면 안되니?"
"출석 부른데요. 안 가면 큰일나요"
이날 서울 시내 중학생들은 남녀 모두 11시부터 서울운동장(지금의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리는 반탁 결의대회 참가를 위해 일찍부터 학교에 나가야 했다. 학교에 모두 집합해서 출석 점검을 한 후 4열 종대를 짓고 교사들의 지휘를 받으며 서울운동장으로 향하는 것이다.

"아무도 도중에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말아. 서울운동장에 가서 출석을 부를 테니까"
일제시대부터 이미 이런 일에는 익숙해져 있으니까 학생들은 어김없이 아침 8시까지 학교 운동장에 집합해 출발했다.
특히 신촌쪽 학생들은 버스나 전철을 타고 가는 것도 아니니까 8시에 집합해서 출석 부르고 우물우물하다가 8시 반에 출발해도 동대문까지 움직이려면 10시가 다 되어 도착하고 각처에서 모인 학생들이 다시 정렬을 끝내려면 11시 개회시간까지 여유시간이 거의 없었다.
밥들이나 제대로 먹고 나왔을까? 풀죽까지 쑤어먹던 전쟁말기보다 식량난은 더 심했는데….

이날 서울 운동장에 모인 학생들은 대학, 전문학교가 16개요. 남녀 중학교가 15개로 참석자가 총 1만여명에 달했다. 그러나 다수는 출석점검 때문에 꼼짝 못하고 끌려나온 중학생들이었다. 당시는 중학이 6년제이니 꼬마들부터 지금의 고교생까지 다 함께 모인 셈이다.
추위를 무릅쓰고도 이날 서울시내 대부분의 남녀 중학생들까지 동원된 것은 그만큼 결의대회를 주도했던 전문학교와 대학 학생 간부들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라의 독립을 찾자고 커다란 플래카드까지 높이 치켜들고 신탁통치 결사 반대를 외치던 그들의 모습은 오늘의 학생들처럼 발랄하고 씩씩한 구석은 별로 없었다.
토끼털이나 개털 귀마개를 하고 목도리를 두른 학생도 있었고 더러는 오버코트를 입고 나오기도 했지만, 영하의 추위에 귀가 얼고 코가 얼고 뺨도 허여멀겋게 핏기를 잃고 있어서 신탁통치 결사 반대를 외쳐도 입은 잘 열리지 않았다.

이날 대회 준비위원장을 맡은 이철승은 그러나 개회사를 통해 "우리 학생은 민족의 꽃이요, 나라의 역군이다. 나라와 겨레의 수난에는 언제나 죽음으로써 조국 수호의 선봉에 섰던 역사적 사실을 인식하고, 조선 사람이라는 자각으로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우리 모두 즉각 자주독립을 요구하자"고 역설했다.
이어 세브란스 의전의 김덕순이 연합국 학생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낭독했으며, 민족자결과 신탁통치 반대 등을 요구하는 5개항의 결의문이 채택됐다.
이날 대회에는 또 반탁국민총동원위원회 백남훈과 독립촉성중앙청년총동맹 대표 김창엽의 격려사가 있었으며 이승만이 비서실장 윤치영을 보내 대회를 격려해 주었다.

궐기대회가 끝난 후 학생들은 만세 3창에 이어 시가 행진을 벌였으며 학생 간부들은 별도로 서울 정동 교회에 모여 정식으로 [반탁전국학생총동맹(반탁학련)]을 결성했다.
이는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강대국들이 만들어낸 신탁통치 계획이 알려지면서 1월 2일 대학과 전문학교 학생 대표들이 서울의 종각 근처 한청빌딩(현 YMCA 건너편)에 모여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전국 학생 조직을 만들기로 합의한데서 비롯됐다.
이 조직은 당시 보성전문의 이철승, 경성대학의 채문식, 그리고 유학생동맹의 박용만이 의장단이 되었고, 이철승은 1월 7일 서울운동장의 대회에서 위원장을 맡음으로써 누구보다도 이 무렵 반탁 학생운동에서 주도적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는 이미 각 정당 사회단체들이 반탁운동에 나설 때 [반탁국민총동원위원회]에도 참가하는 등 우익진영과 깊은 연계를 맺고 있었다.

한편 우익진영의 [반탁학련]에 맞서 좌익진영에서도 1월 9일 [재경학생행동통일촉성회(학통)]를 결성했다. 학통은 당시 경성대의 김홍태를 중심으로 보성전문, 연희전문, 혜화전문(동국대 전신) 등의 좌익 학생이 참여했으며 회장은 명륜전문(성균관대 전신)의 주석일이 맡아 신탁통치 찬탁 운동을 투쟁의 최대 목표로 삼았다.
신탁통치 찬·반이 초기 독립을 열망하는 우리 민족의 분노요, 애국심의 발로로 나타났다하더라도 그 배후에는 이처럼 좌우 민족 분열의 정치상황과 무관할 수 없었으며, 국대안 파동도 그런 의미에서는 신탁통치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국대안은 다분히 물리적 힘이 우세한 쪽으로 정세가 바뀌기 시작했다.
학생운동의 순수성이 정치세력에 의해 오염되기 시작한 것은 공산진영과 민족진영의 첨예한 대립을 불러온 해방 당시부터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 ○ ○ ○

이날 남녀 학생들이 아침 일찍부터 동대문에 집결했지만 추위에 떨면서 밖으로 나가 아우성을 친 사람들은 비단 이들만이 아니었다.
이 땅의 다른 한쪽에서는 우리가 눈여겨볼 또 다른 광경들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화(東和), 한일(韓一), 정자옥(丁子屋) 백화점에는 이날 아침 일찍부터 사람들이 몰려들어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중에 제일 큰 백화점은 동화백화점으로, 이상의 소설 [날개]의 주인공이 마지막에 정오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날개야 돋아라, 다시 한번만 날아보자꾸나하며 그래도 다시 한번 살아보고 싶은 애절한 욕망을 돋구던 5층 옥상이 바로 이 곳이다. 지금의 신세계 백화점이다.
이날 함지나 양동이, 부대자루를 들고 기다리던 부인네들은 백화점 문이 열리자마자 왈칵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밀고 밀리는 사이 헐렁하던 고무신이나 게다짝이 나뒹굴었으나 그들은 이에 개의치 않고 조금씩 나눠주는 쌀을 타기 시작했는데 이것도 금방 동이 나고 말았다. 쌀 구입표는 이미 받아왔는데 쌀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다음날 시청으로 몰려갔다.
"8일 이른 아침부터 추위를 무릅쓰고 시내 각처에서 수천명이 몰려들어 선착순으로 구입표를 받지 못한 대다수의 시민들은 서울 시청에 몰려와 진정(陳情)한 소동이 있었다. 이에 대하야 … "
이것은 9일자 동아일보 기사다.
수천명의 시민들이 가족들 다 굶어죽게 되었다고 아우성치며 시청으로 몰려갔다면 서울운동장에 1만명의 학생이 모여 함성을 지른 것은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 서울시청의 시민들은 죽느냐 사느냐의 생존권 문제로 핏발이 서서 몰려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날 같은 시각에 인천에서는 또 다른 역사적 광경이 목격되고 있었다.
약 3천여명의 동포들이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국 배를 타고 떠난 후 이날 인천항 부두에 도착한 것이다. 그 중의 천명쯤은 일반인이었지만 2천여명은 하와이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던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대개 징병이나 학도지원병으로 끌려나가 남방전투에 투입되었다가 포로가 되면서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그 중의 일부는 이미 '전사통지서'까지 집에 배달되어 있었고.
이날 인천항에 들어온 귀국선은 미국 배만이 아니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귀국선도 2척이나 있었다. 모두 일본 땅에서 해방된 조국을 찾아 돌아온 동포들이었다.
해방이 되면서 많은 동포들이 돌아왔지만 아미도 이날은 죽었다는 아들까지 포함해 수천명이 함께 돌아왔기 때문에 귀국선 역사상 가장 감격적인 날이었을지도 모른다.

돌아오네 돌아오네 고국산천 찾아서
얼마나 그렸던가 무궁화 동산
얼마나 그렸던가 태극 깃발을
갈매기야 울어라 파도야 춤춰라
귀국선 뱃머리에 …

이런 노래가 그 당시 유행하게 된 것도 귀국선이 얼마나 많은 우리 민족의 한과 슬픔의 역사를 쏟아 놓았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장정들이 뜻밖에 살아 돌아왔으니 민족적으로는 거대한 환영의 축제라도 올리고 참혹했던 수난에 대해 위로를 아끼지 말았어야 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는 그럴만한 겨를이 없었다.

고국 땅을 찾아온 그들이 첫날부터 한국의 흙을 밟으며 들은 소식은 독립의 날이 아직은 멀고, 땅이 두동강나 남북으로 오가지도 못하며, 물가는 매일 천장부지로 치솟고 식량은 떨어져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간신히 생명을 부지하고 있다는 이야기들뿐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취재지원=이일형 차장】
한국대학신문 기자 (news@unn.net) | 입력 : 00-05-01 오전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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