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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해방 후 대학 설립 현황
미군정을 거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3년간 이 땅의 고등교육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먼저 그 동안에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국립 서울대학교는 정상적인 궤도에 올라섰다. 관악캠퍼스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여러 개의 단과대학이 흩어져 있었지만 그래도 동숭동의 대학본부와 문리대를 중심으로 미대와 음대가 생기고, 법대 등이 한데 모아지기 시작했다.

먼저 그 동안에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국립 서울대학교는 정상적인 궤도에 올라섰다. 관악캠퍼스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여러 개의 단과대학이 흩어져 있었지만 그래도 동숭동의 대학본부와 문리대를 중심으로 미대와 음대가 생기고, 법대 등이 한데 모아지기 시작했다.

음대도 신설되었는데 정말 무리하게 문리대 안에 세워졌다. 그 안에서 독립된 건물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그래봐야 비좁은 한 울타리였다. 다른 대학이라면 몰라도 음대는 온갖 악기를 연주하고 목청을 높여야 하기 때문에 문리대와 음대는 피차간에 불편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내가 겪은 바로는 당시 음대는 너무도 조용했다. 너무 겸손했거나 아니면 남의 울타리 안에 비집고 들어간 죄 때문에 가난한 셋방 집 아이들이 주인이 무서워서 마음대로 떠들지도 못한 것과 비슷한 이치가 아니었나 싶다.

법대는 지금 문예진흥원 건물인 대학본부 바로 뒤 담 너머에 있었다. 담을 넘어가면 일제시대부터 공업연구소가 있었고 그 옆에 허름한 건물들이 붙어있었다. 그곳이 법대가 되었다. 그곳과 대학본부 사이에는 양쪽 담이 있고 골목이 있었다. 그 골목을 가로질러 넘어 다니기 위해 구름다리가 만들어졌다. 이 구름다리를 가장 많이 이용한 사람들은 법대생들이었다. 고시 준비생들은 늘 그곳을 넘어와 중앙도서관에서 공부했고 또 강의 일부도 문리대 건물에서 했으니까.

대한민국의 신생 국립 서울대학이 되면서 교복과 교모도 새로 만들어졌다. 다른 대학에서는 일제시대부터 사용한 사각모를 계속해서 썼지만 서울대는 베레모를 썼다. 지금은 베레모가 별 것 아니지만 중절모나 소위 '도리우찌' 만 쓰던 시대에 등장한 베레모는 한껏 서구적인 멋을 풍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처음에 신입생들이나 할 수 없이 등록금에 묶여서 교모 값을 냈기 때문에 쓰고 다녔지 대게는 내던져 버렸다. 그래도 교복만은 오래 입는 학생들이 많았다. 비싼 돈을 주고 샀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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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사립 전문학교들의 대학 승격과 신규 대학의 설립도 잇따랐다.

연희전문, 보성전문, 이화여전 등은 모두 종합대학으로 승격됐으며, 국립부산대, 국립해양대 등 국립대와 청주상과대학, 단국대, 국민대, 조선대 등 사립대학들이 새로 설립되거나 설립 인가서를 제출하는 등 미군정 3년을 거쳐 신생 정부가 수립되기까지 대학 승격이나 설립 움직임이 봇물을 이루었다. <대학설립 현황 참조> 이것은 일제의 식민통치가 얼마나 우리들의 배움에 대한 욕구를 잔인하게 억압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얼마나 배움에 대한 한이 맺혀 있었는지를 입증하는 것이다.

유억겸 문교부장의 회고담은 그런 의미에서 당시 상황을 잘 표현해준다. "광복이 되자 우후죽순과 같이 대학 설립 기성회를 각 시·도에서 시작하여 그 설립 인가서가 문교부에 쇄도하였다. 일제의 압박 아래 35년간 우리 말도 우리 글도 쓰지 못하고, 우리 역사도 배우지 못하다가 이제 우리 마음대로 자유롭게 교육할 수 있고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감격이었으며, 또 일본 강점 하에서 온갖 압박과 착취를 당하면서 푼푼이 축재한 존귀한 현금과 토지를 광복된 조국의 민족교육을 위해 투척하는 그 성스러운 심정에 대한 감격이었다"

그러나 그 동안 극단적인 억압으로 우리가 자주적인 건국 준비를 제대로 못하고 있었듯이 대학 설립 역시 심정적 열기와는 달리 경제적으로나 현실에 있어서는 준비가 매우 부족했다.

"저게 뭐야? 자기 집 대문에다 대학 간판만 붙이면 대학이 되나?" 당시 나는 시골에서 올라와 친구와 함께 서울의 남산 밑에 있던 미술대학을 찾아갔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2층이지만 내 고향집보다도 작은 집에 대학 간판만 붙인 격이었다.

"야 그만둬라. 저게 무슨 대학이냐?" 당시 나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그는 그이고 그 대학을 졸업했으며 지금은 명문 미술대학의 아득한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그 시절을 자랑스럽게 전해주고 있다. 이렇게 개척자들이 황무지에 빈손으로 집을 짓듯이 큰 꿈을 안고 대학을 설립하기 시작했지만 그것은 너무도 험난한 길이었다. 빈손으로 시작했다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허술한 판잣집을 세우자마자 폭풍이 몰아치고 지진이 일어나고 불길이 치솟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때 그것을 알지 못했다. 우리 정부가 세워지고 독립된 우리의 땅에 원대한 꿈을 삼는다는 포부만 가득했을 뿐 강대국들이 벌이는 국제정세를 예측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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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9월 신학기제 실시와 전문학교의 승격을 앞두고 문교부 고등교육위원회가 6월 8일 발표한 '고등교육제도의 임시조치'는 대학을 설립하려는 교육계 인사들에게 큰 자극제가 되었으며, 이후 3년여에 걸쳐 전국 각지에서 대학 설립과 승격 준비 작업이 붐을 이루었다.

문교월보에 따르면 1948년 당시 고등교육기관의 수는 총 42개교로서, 종합대학 4개교, 단과대학 23개교, 초급대학 4개교, 대학 학력을 인정해 주는 각종 학교가 11개교에 이르렀다. 이 이간 중 교원수는 1천2백56명, 재적 학생수는 2만4천여명으로 이는 해방 당시 학교수 21개교, 교원수 7백53명, 학생수 7천1백10명과 비교할 때 두 배 이상의 성장을 나타내는 것.

그러나 시행초기에는 대부분의 공립학교와 일부 사립 전문 학교가 문교부의 국대안 계획에 따라 국립 서울대학교로 흡수 병합되고, 역사가 깊은 연희전문이나 이화여전, 보성전문 등이 종합대학으로 승격하는데 그치는 등 시설이나 설비, 교수진의 미흡 등으로 대학 설립 인가가 일부에 국한됐다. 이 과정에서 일부 전문학교는 단과대학 승격에 만족해야 했으며 지역주민과 토착 지주들을 중심으로 한 대학 설립이나 전 단계로 도입된 '학관', '각종학교' 설립이 잇따랐다.

그렇다면 이 당시 대학설립을 주도해 나간 사람들은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었을까?

첫째, 일제 시대에 사학기관에 종사하고 미군정과 문교 관료 집단으로 등장한 핵심적 주요 세력이 대학 설립을 추진하거나 주도한 경우다. 이는 전술한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 과정이나 이후 경북대, 부산대 설립 과정이 대표적인 사례다.

둘째, 일제 시대를 전후해 설립된 기존 사립 전문학교가 해방 후 그대로 복원돼 정규대학으로 승격된 경우다. 연세대, 고려대, 이화여대, 숙명여대, 동국대 등이 주요 사례에 해당된다.

셋째, 조선대처럼 특정인의 재산에 의존하지 않고 지역의 관료와 전문적 집단을 중심으로 종합대학을 설립하기 위해 기성회를 조직했다가 국대안 반대의 영향으로 인해 사립대학으로 설립된 경우다.

넷째, 건국대, 국민대, 단국대, 홍익대 등 대부분의 사립대학은 대학 설립 의지를 가진 특정인, 다시 말해 일제 하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정계, 의학계, 법조계, 교육계에 종사한 전문직 관련자를 중심으로 특정 지주의 토지 기부가 계기가 되어 대학으로 탄생한 경우다.

그런데 이 시기에 대학 설립 움직임이 본격화된 것은 전술한 것처럼 일제 치하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식민지 백성의 한이 분출된 것이기도 했지만, 그 이면에는 교육 주도 세력들의 기득권과 토착 지주들의 이해가 맞아떨어져 진행된 경우가 많았다.

이는 당시 대학 설립이 일제 시대의 기득권과 출신 배경, 문교 관료집단과의 학연이나 친분등으로 비교적 손쉽게 이루어지거나, 농지개혁이나 문교재단에 대한 특별 보상을 앞두고 자산 관리의 한 방편으로 교육재단에 지주들이 토지 기부를 하면서 시작된 경우가 빈번했던 점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특히 지주층은 농지개혁을 앞두고 사전 방매, 소유권 분산 등과 같은 처리 방편을 찾아 교육재단에 기부나 명의변경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실제 이들은 대학의 운영과 유지에는 관여하지 못하고 설립의 주체였던 전문직 종사자의 보조 역할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요즘 말로 하면 기업체의 오너가 전문경영인을 끌어들인 셈이다.

그래서 때때로 이들간의 주도권을 둘러싼 분쟁이 빈번할 수 밖에 없었으며 일부의 경우 5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학 분쟁의 원인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배경에도 불구하고 일제를 거쳐 미군정과 정부가 수립되기까지 이 땅의 교육은 학생들의 높은 향학열과 교육 관련 종사자들의 사명의식이 결합되면서 고등교육의 양적 확대가 두드러졌으며, 이렇게 배출된 인재가 사회 각 분야에서 사회 발전에 기여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때로는 설립자와 교육 종사자들의 눈물과 애환, 각고의 노력이 대학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때로는 고통과 분노가 명멸해 가는 가운데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며 오늘날의 상아탑으로 정착돼 갔던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취재지원=이일형 차장】

한국대학신문 기자 (news@unn.net) | 입력 : 00-06-05 오후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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