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우리나라 최초의 의학전문 고등교육기관으로 성장하던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교장은 에비슨(Avison)의 뒤를 이어 한국인 오긍선으로 바뀌고, 1941년에는 이영준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런데 총독 미나미지로(南次郞)는 일어 사용을 강요하고 창씨개명을 강요하더니 세브란스 의전까지 창씨개명을 적용한 것이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1942년 일본식의 [아사히의학전문학교]다. 일본의 국기가 일장기(日章旗) 이듯 '아사히'는 '아침 해'로 그들이 많이 애용한 이름이다. 한편 연희전문 교장도 원한경에서 41년에는 한국인 윤치호로 바뀌고 재단 이사회에 일본인 이사 5명이 끼어 들었다. 1년 석달 뒤인 42년 8월에는 윤치호도 물러나고 총독부의 학무국장이 관리하다가 일본인 다까바시(高橋濱吉)가 교장이 되었다. 그러다가 곧 나까지마(中島)로 바뀌고 다시 가라지마(辛島驍)로 바뀌었다. 학교명도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로 바뀐 것이다. 이같은 변화는 일본이 미국과 영국에 대해 전쟁을 시작했기 때문에 연희전문을 적국 재산으로 간주해서 접수한다는 절차를 밟아나간 셈이다.
이화여전도 45년 4월에는 [경성여전]으로 바뀌고 학교행정 실권도 일본인 학감 고오모또(高本)에게 빼았겼다. 이렇게 모든 것이 전시동원체제로 개편되었던 관계로 해방 후 종합대학으로 출발하면서 이름을 다시 바꿔 큰 꿈을 키워 나가게 된 것이다. 이때 이화여대는 종합대학 신청일자가 46년 6월 24일로 기록된 제 1호 인가서, 연희대는 7월 31일부로 기록된 제2호 인가서, 고려대는 신청일자가 8월 5일부로 기록된 제3호 인가서를 각각 미군정청으로부터 받음으로써 8월 15일 종합대학 승격의 법률적 토대를 갖추었다.
그런데 이들 대학이 우리나라의 대표 사학으로 자리매김하는 데는 무엇보다 설립자들의 숨은 공로와 이들이 남긴 유산이 지속적인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뿌리는 서로 달랐지만 구한말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들 대학의 설립 배경 속에는 일반에 알려지지 않은 고통과 애환이 있었으며, 일제를 거쳐 해방에 이르는 동안 때로는 돌발적인 사건과 사고 속에서도 수많은 선각들의 예지와 교육 재건 의지가 결합되면서 민족 사학의 뿌리를 내려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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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연세대학교는 [연희]와 [세브란스]를 합친 이름이다. 이것은 일찍부터 따로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던 나무가 서로 만나 서로를 끌어안고 하나의 거목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두 개의 뿌리 중 하나는 광혜원(廣惠院)으로 1885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알렌(H.B,Allen)이 고종의 위촉으로 개원한 왕립병원이다.
'광혜원'은 다시 '제중원(濟衆院)'으로 바뀌고 이를 전담할 청년 의사 에비슨이 부임했다. 여기서 의학교육이 처음 시작되고 미국 실업가인 세브란스(L.H.Severance)의 기부로 병원이 신축돼 세브란스의전의 기본 축이 형성된 것이다.
다른 뿌리는 1915년에 설립된 '조선기독교대학'이다. 이미 이 땅에 와 있던 언더우드(元杜尤. Horace Grant Underwood)가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본부와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 등의 도움을 받아 설립한 것이다. 그런데 이때는 이미 평양의 숭실학교에서 대학교육을 실시하고 있던 북장로교선교협의회가 설립을 반대해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 그러나 연희의 역사는 무엇보다 설립자 언더우드 일가의 헌신과 노력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려웠으리라는 지적이 많다. 언더우드 일가는 1885년 4월 선교사로 한국에 첫발을 내디딘 원두우 목사에서부터 비롯돼 2대 원한경(Horace H. Underwood), 3대 원일한((Horace G. Underwood), 4대 원한광((Horace H. Underwood)에 이르기까지 1백여년간 한국인과 희로애락을 같이 해 온 특이한 가계(家系). 1915년 연희전문을 설립, 초대 교장에 재직했던 원두우 목사는 26세의 젊은 나이로 내한해 1916년 학교 기금 모집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그 해 57세의 나이로 숨질 때까지 31년간 한국인을 위한 사회봉사, 선교활동, 교육사업 등에 기여했다.
1890년 서울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숨진 원목사의 외아들 원한경은 1917년 연희전문 교수로 교육계에 종사하는 한편 재임한 지 17년만인 1934년에는 연희전문학교 교장직을 맡아 학교 운영에 직접 참여했으나 일제 탄압이 심해지면서 일인 교수 채용, 신사참배 등으로 곤욕을 겪기도 했다. 특히 원한경의 4남 1녀들은 모두 한국에서 교육자와 목회자로 활동했으며 장남인 원일한은 부산의 일신병원이사, 한미우호재단이사, 연세대교수 및 현재는 연세대 이사로 재직하면서 사회사업과 교육사업의 길을 걸어온 인물. 이밖에 원일한의 맏아들로 태어난 원한광은 현재 연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장학재단 일을 하고 있으며 원래 슬하에 2남을 두었지만 지난 70년대 초 한국인 고아 2명(로라 언더우드, 사라 언더우드)을 양녀로 입양하는 등 한국인과의 끊을 수 없는 인연을 보여주고 있다.
인더우드 일가는 이러한 특성으로 지난 94년에 인촌상 공공봉사부문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인촌상을 수상한 것도 그렇지만 개인이나 단체가 아닌 한 집안. 그것도 외국인이 선정되었다는 점에서 이들 가계가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과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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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전문은 창립 당시부터 종합대학을 염두에 두고 기구와 조직을 출발하였으나 일제의 식민 정책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미군정청이 접수 사무를 시작한 1년 뒤 대망의 종합대학교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런데 교명을 정할 때 [연희]로 하느냐 [조선]으로 하느냐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는 해방 후 연희전문의 '연희'를 그대로 살려 [연희대학교]로 하자는 주장과, 보성전문도 [고려대학교(Korea University)]로, 경성대학도 [서울대학교]로 개명한 것처럼 영문표기가 [Chosun Christian University]가 되기 때문에 새 출발을 담는 의미에서 [조선대학교]로 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연희로 하자는 의견이 우세해 연희대학교로 정하게 되었던 것. 대학 편제는 종합대학 설립인가를 제출한 뒤인 8월 6일 원한경을 비롯, 연전 교수로 재직하며 당시 선교사로 와 있던 베커(Becker), 빌링스(Billings), 원일한 등이 참여해 대학원(국문, 영문, 사학, 철학, 정치외교, 교육), 상학원(상학, 경제학), 이학원(수학, 물리, 화학), 신학원(신학)으로 나누는 한편 초대 총장에는 백낙준을 임명해 그 해 10월 25일 개교식을 거행했다.
이밖에 특이한 것은 연희대에서 해방 후 최초로 [남녀공학제]를 실시했다는 점이다. 지금은 대학에서 남녀공학제를 실시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세상이 되었지만 1946년부터 연희대에 여학생 입학이 허용되면서 당시에는 이를 두고 사회의 반대 여론도 많았으며, 여학생을 위한 학교시설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
원일한은 이렇게 회고한다. "당시 입학한 여학생은 10여명에 불과했지만 여학생 휴게실을 만들기 위해 동문 서주한 결과 하와이 교포들의 성금을 받아 본관 옆에 작은 건물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이 건물은 하외이 원주민의 '안녕'이라는 인사말을 따 '알로하관'이라고 불렀지요" 그러나 연희가 정상적인 학사운영을 하기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는 여전히 산적했다. 일제시대부터 존재해 온 전문부와 학부간 학사 처리를 비롯해 시설, 설비, 교수 요원의 부족 등은 대학교육을 정상화시키는데 장애가 되었으며 무엇보다 재정 확충이 시급했다. 그리고 당시 명예총장이면서 미군정청 중앙심의회 위원으로 있던 원한경의 부인이 좌익테러로 숨지는 돌발적인 사건이 발생한 것은 해방공간에서 좌 우 이데올로기 대립이 학원가에서도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짐작케 하는 불행한 사건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취재지원=이일형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