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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종합대학 승격된 이화와 고려, 설립자들의 숨은 공로와 애환.
연희대와 고려대 이화여대가 해방 후 1주년에 맞춰서 종합대학의 간판을 달며 빠른 변신을 시도한 것은 국립 서울대 출현에 고무된 바가 컸다. 서울대학교의 모체였던 경성제국대는 아무리 좋은 시설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한국인 학생을 극도로 제한하며 식민통치체제의 한 기구로 존립했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서 외국 선교사들이나 우리들이 만들어나가던 고등교육기관은 대학 간판을 못 달고 수많은 수난을 겪으며 전문학교로 남아있어야 했다. 이렇게 수난을 거듭하며 겨우 살아남다가 해방이 되자 할 일도 많았다.

이들은 먼저 잃어버렸던 이름부터 되찾거나 새 이름을 갖기 시작했다. 특히 발빠르게 움직이던 이화는 일제말 '경성여자전문학교'에서 '이화여전'으로 복귀했으며 다시 '이화여자대학'으로 교명을 바꿨다.

그런데 이화 연희 고려 등이 종합대학 체제를 서두르기는 했지만 행정적으로는 이에 필요한 법적 절차나 제도 등이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 절차에 구애받지 않고 이미 이화여대는 8월 15일 다음날에 스스로 종합대학 이름으로 학생모집까지 받았다.

9월 24일자 매일신보에는 '이화여자대학'의 이름으로 문과, 가사과, 보육과, 음악과, 의학과 등의 학생 모집 공고가 나갔다. 그리고 그 해 10월에는 첫 입학시험이 치러졌다. 해방 공간에서 벌어진 이같은 교육열은 이화가 제도와 절차를 뛰어 넘으며 여성교육을 선도하는 대명사로 자리잡는 원인이 되었다.

여기에는 '천연동 회의'로 대표되는 교육 주도세력들의 영향력이 뒷받침이 되었지만 미군정 의료당국으로부터 교사를 징벌 당할 위기에서 이를 지켜낸 초대 총장 김활란의 활약도 큰 힘이 되었다. 그런데 이화의 전설로 자리잡은 김활란의 활동 이면에는 50여년전 이 땅에 여성교육을 심고자 방문한 선교사들의 숨은 공로와 애환이 깃들어 있었다.

그럼 이제 이화의 기원이 된 구한말로 눈길을 돌려보자.

1986년의 어느 날. 미국인 선교사들이 사는 서울의 정동에 가마를 타고 하인을 데리고 나타난 유부녀가 있었다. 이화학당을 지어놓고 기다리던 끝에 처음으로 나타난 학생이었다. 김씨 성을 지닌 기혼 여성이며 고관의 소실인데 영어를 배워서 왕비의 통역자가 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당시로서는 놀라운 성취욕과 진취성을 지닌 여성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그녀는 병을 얻어서 3개월만에 학업을 중단하고 다음에는 꽃님이, 별단이, 김점동(후에 최초의 양의사가 된 박에스터) 등 10세 미만의 애들이 모이게 되었다. 이중에서 별단이는 4살쯤 된 아이였다.

35명을 수용할 수 있는 기와집을 짓고 여학생을 모집했는데 이처럼 학생들이 모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외국인 선교사들에 대한 이질감과 여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극단적인 편견과 터무니없는 헛소문들이 원인이 되었다. 선교사들은 우리 아이들을 살찌워서 피를 빨아먹는다는 소문이 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선교사 스크랜톤(M.F.Scranton)은 미국 감리교 해외 여선교회(W.F.M.S)의 지원을 받아 아펜젤라(H.G.Appenzeller), 언더우드(H.G.Underwood) 등과 한 배를 타고 미국을 떠난 후 6개월 만인 1985년 4월 5일 인천항(당시 제물포)에 도착했다. 그리고 스크랜톤이 미국 여선교부의 소명에 따라 지금의 정동에 학교부지를 장만하고 여성 교육의 의지를 다짐한지 1년여만에 겨우 첫 학생을 만났던 것이다.

스크랜톤은 이같은 어려움이 일반의 편견과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이를 풀기 위해 노력했는데, 1887년 2월 고종이 외아문을 통해 '이화학당(梨花學堂)'이란 교명을 하사하면서 비로소 일반의 신임을 얻으며 교육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렇게 출발한 이화의 교육은 초기에는 일본인이나 한국인, 미혼, 기혼을 가릴 것 없이 시작되었으며 20여년간 정해진 학제나 학년 구분도 없이 운영되다가 1908년 6월 창립 23년만에 중등과 전 과정을 마친 송수산나, 김노리베카, 김순이, 김활란, 박경숙 등 5명의 졸업생이 처음으로 배출되면서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리고 훗날 이들을 기반으로 이화의 교육이 지속되었으며, 한국인에 의한 교육이 점차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1910년에는 이화 역사상 처음으로 대학과가 설립되고, 1915년에는 유치원 사범과가 설치되면서 여성 고등교육이 시작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일제는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1911년에 발표한 조선교육령에 따라 조선인의 대학 설립을 제도적으로 막았고, 교육기회를 제한하기 위해 1915년에는 '전문학교규칙' '개정 사립학교규칙'을 잇따라 발표함으로써 사립학교 감독을 한층 강화했다.

대학 설립이 무산된 이화학당 대학과는 1925년 3월 재단법인 미 감리교 조선인선교부 유지재단 이사 홀의 명의로 이화여자전문학교 인가신청을 내고 4월 23일 총독부의 인가를
받았으며, 그 해 9월 이화 당장이던 아펜젤라가 교장에 취임함으로써 새로운 출발을 모색하게 된다.

그리고 남감리교회 등의 경영참여로 여자연합대학의 기반을 다진 이화는 몰려드는 학생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교사와 시설 확충을 위해 지금의 신촌에 6만5천여평의 새 교지를 구입하는 한편 매년 국내외에 걸쳐 건축 모금에 착수, 35년까지 석조건물 4동과 강당, 기숙사, 실습실 등 부대 시설을 마련함으로써 오늘날 종합대학으로써의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광복 직후 9개학과에 9백여명이던 학생수가 1961년에는 1개대학원 7개대학 35개학과에 학생수가 8천여명으로 늘어날 만큼 양적 성장을 보이고, 오늘날 명실상부한 종합대학의 위용을 자랑할 수 있었던 것도 이때 마련된 신 교사와 기금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이루어지기 힘든 일이었다.


○ ○ ○ ○

연희와 이화가 미 선교사 아펜절라와 언더우드, 스크랜톤으로부터 연유되었다면 해방 후 나란히 종합대학교로 출발한 고려대학교의 설립 역사는 이와는 사뭇 다르다.


구한말은 '병자수호조약'등 일본의 강요된 개국으로부터 구미열강의 공공연한 세력각축장이 되었던 시대였다. 이 당시 외국의 존재에 대해 사실상 정보가 미흡했던 조정이나 민중들의 삶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갑오경장, 을미사변, 아관파천 등의 사태를 맞아 충격과 당혹감이 팽배했다. 특히 보수와 개화, 친청-친일-친미-친로파 등의 세력 다툼 속에 방향을 잃고 헤매었다.

이런 판국에 외세의존을 청산하고 자유와 평등의 민권을 누림으로써 민족의 독립과 발전을 이룩하려는 운동이 일어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농민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바로 동학이었다. 그것은 한국 최초의 근대적 사회개혁을 지향하는 가장 강력하고도 혁명적인 변화였다. 비록 조정과 외세의 개입에 의해 실패하고 말았지만 후일 이 운동의 발전 형태인 천도교회가 보성전문을 경영하게 되는 것도 하나의 '숙명'이었다.

일본으로부터 을사조약이 강요되던 1905년 이용익에 의해 설립된 보성전문은 바로 이같은 사회 배경 속에서 탄생했다. 이용익은 함북 명천 사람으로 봇짐을 나르는 미천한 출생이었으나 당시 세도가이던 민영익에 의해 발탁돼 명성황후에 소개되면서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확고한 신임을 얻으면서 황실 내부의 보물을 보존하고 재산을 관리하는 내장원의 책임자가 되는 등 왕실 내 요직에 중용되었다.

그러나 러·일 전쟁의 정치적 역학관계 속에서 중립을 주장한 이용익은 일본에 의해 강제 납치돼 1년여의 기간 동안 본국에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보성전문의 건학 구상은 바로 이런 시기에 탄생된 것이었다. 서양의 근대문명을 30년 전에 도입하고 발전시킨 일본을 직접 관찰하고 국권회복의 방향과 의지를 굳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용익은 1905년 1월 귀국하자마자 당시 대보성(大普成)의 교육기관을 소학교에서부터 전문학교까지 체계적으로 설립한다고 밝혔다. 이를 기점으로 이 땅에서는 '민간사학 설립 붐'이 일어 엄주익의 양정의숙을 비롯해 한성법학교나 광성실업학교 등이 생겼으며, 이듬해 명진여학교, 숙명여학교, 중앙학교, 대성학교, 오산학교, 서우사범 등 명문 사학이 잇따라 설립되기도 했다.

그런데 '보성(普成)'이라는 교명은 고종황제가 입궐한 이용익의 교육체계안을 듣고 매우 기뻐하면서 지어준 것으로 전해진다. 당초에는 '보통(普通)'이라는 이름이 물망에 올랐으나 고종이 {'보(普)'자는 좋으나 통(通)자는 고전에 '成人之美'라는 말도 있고 문왕의 '成人之德'이라는 말도 있으니 대·중·소학을 모두 보성(普成)으로 고쳤으면 좋겠다}는 말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보성전문의 초기 모표와 교기가 대한제국의 황실을 상징한 李花章(오얏꽃)을 사용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이화(李花)'는 마치 일본의 국화문장이나 프랑스의 백합, 랑카스타의 붉은 장미와 같이 당시 조선 왕조를 상징하는 의미로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고려대 홍일식 전 총장은 이와관련 "당초 보성의 설립 의도는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가 왕립기관으로 설립하려던 의중에서 비롯되었으나 이후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면서 그 꿈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며 "만일 보성이 왕립기관으로 육성되었다면 오늘날의 고려대학과는 큰 차이를 보였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홍총장 재임 시절인 지난 98년 1월 지금의 학생회관 옆에 지하 2층, 지상 2층 규모로 완공한 4·18기념관(교사자료실, 유공자 전시실, 상설전시실, 소극장)에서도 유래를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보성전문은 이용익이 경영 재원을 맡기로 하여 우선 '전동아어학교( 洞俄語學校)'를 빌려 교사를 마련하고 법률, 이재, 농학, 상학, 공학의 5개전문학과를 가진 2년제 전문학교를 창설, 1905년 3월 역사적인 모집 광고를 냈으나 후일 이러한 연유로 학교 경영 자금이 황실재산에서 일부 지출되기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보성전문은 일제 강점기인 1910년에 들어 새 전기를 맞게 되었다. 경술국치로 교주 이종호와 보성중학 교장 노벽린이 해외 망명길에 오르고 재원 마련에 막연하던 민족사학 육성에 남다른 지원을 아끼지 않던 당시 천도교회에 경영권을 부탁하게 되었기 때문. 의암 손병희에 의해 창도된 천도교회는 당시 민권 운동의 가장 강력한 보루였다. 10여개의 학교를 운영하던 천도교 총부는 1911년 들어 보전의 새 경영자가 되면서 학감이던 윤익선이 교장에 임명되고 중학교에는 천도교 총부측의 최린이 교장대리로 임명됐다.

그러나 천도교측은 보성전문을 종교계 학교로 만들려고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일부 미션계 학교처럼 교학의 목적을 자기 교파의 교리에 얽매려 하지 않았다. 이는 후일 3·1 독립 운동에서도 기독교, 불교와 더불어 오직 '보국안민'의 이상으로 원만한 협력을 이루려 했던 것처럼 민족교육의 방침을 세운 보성전문의 기존 방침 그대로 발전하기를 원했던 데에서 비롯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 강점기의 민족교육은 학생들의 항거와 독립운동에 따른 일제의 탄압, 여기에 재단 분규와 경영상 이견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이미 중앙학원을 경영하던 인촌 김성수가 1932년 보성전문을 추곡 5천석의 토지 기부 대가로 인수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동아일보를 창간하고 민립대학 건설의 이념을 가졌던 토착자본가 김성수는 학교 인수 당시 이미 한양전문학교라는 교명까지 지어 놓았으나 교명 존속과 직원의 지위 보장을 원하는 구재단의 뜻을 존중해 교명을 해방 후 종합대학 승격전까지 유지했다. 그리고 송현동 교사 6백여평의 보성전문 교지는 그 해 6월 10대 교장에 취임한 김성수가 보성전문 창립 30주년이 되는 1933년 중앙학원을 통해 현 고려대 자리인 안암동 일대 부지 6만2천여평을 매수, 신 교사를 신축함으로써 초석을 다졌다.

일제말 암흑기를 거쳐 해방을 맞은 보성전문은 종합대학으로 승격되는 46년을 기점으로 전반적인 교육제도를 정비하는 한편 김성수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고구려의 기상과 자강자주의 영광을 계승한 '고려(高麗)'로 재탄생해 오늘에 이르렀다. 해방 후 새로 탄생하는 국립 서울대학교에 교명을 빼았길까봐 노심초사했다는 김성수가 바로 고려라는 교명을 정하게 된 지론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이제 우리가 세우는 대학은 반드시 우리나라의 민족을 대표하는 대학이 되어야 하겠고 그러자면 교명도 마땅히 한국사상 국호 중에서 민족사의 꿋꿋한 정통성을 상징하는 것이어야 하겠는데 '朝鮮'이나 '韓國'은 외세에 시달린 상처 때문에 개운치 못하다는 것, 이 '高麗'도 거란·여진·몽고 등의 외침에 시달리긴 했지만 '高句麗'의 씩씩한 기상과 그 자강 자주의 영광을 계승하였을 뿐 아니라 문화도 찬란하였고, 삼국통일의 위업을 계승한 왕조로서 대고구려의 웅비하는 민족의지를 대표하고 있어 마음에 든다. 거기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외국어 명칭인 'KOREA, COREE'도 고려의 음을 표기한 점에서 우리 민족이 세계에 알려진 대표적 국호이므로 적격하다"

<다음 호에 계속> 【취재지원=이일형 차장】
한국대학신문 기자 (news@unn.net) | 입력 : 00-07-18 오전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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