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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왜곡된 설립 역사의 시작과 끝 - 박철웅과 조선대
본사 취재팀은 대구에서 호남지방으로 넘어갔다. 가는 도중 차 속에서 박근혜 얘기가 나왔었다. 기념관을 세우고 이곳에 보존하려던 부친 박정희의 유물들을 트럭 7대에 싣고 그곳을 떠날때 그녀의 심정은 어땠을까 하면서. 기념관 건립은 그렇게 무산되었다.(앞에서 서술한 '기념관도 세워지고'는 '세워지려고'로 고침)
다음에 우리는 호남으로 넘어가 유명한 조선대학 취재에 들어갔다.
여기서 말하는 유명대학은 그 대학이 마땅히 대학으로서 지녀야 할 평가기준이나 일류대학으로서의 국내 명성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광주의 조선대학이 전국적으로 유명한 까닭은 그 동안의 성장과정에서 특히 박철웅씨 일가가 남긴 많은 일화 때문일 것이다.
광주에 들어서면 무등산 자락에 20개의 삼각형 지붕이 늘어서 있는 듯한 특이한 양식의 조선대 건물이 보인다. 그리고 이 대학을 볼 때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대학의 총장 또는 이사장, 아니면 설립자라는 이름으로 회자되던 박철웅을 연상하게 될 것이다.

1946년 9월부터 설립운동이 일어나고 다음 해에 이미 큰 본관 건물이 들어서며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모습을 본 많은 사람들은 박철웅의 의지와 추진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의 추진력이 놀랍더라도 날이 갈수록 탐욕스럽고 난폭한 제왕으로 변해 간 모습을 가까이서 본 사람들 중에는 너무도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혔던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수많은 민중을 혁명대열에 끌어들여 조국의 제단에 피를 뿌리게 한 후 권좌에 오르자마자 무서운 독재자로서 민중을 억압하고 자신을 태양으로 만들게 한 괴물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대학 설립 후 30여년이 지난 뒤의 조선대학 모습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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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대 설립 36년을 축하하는 개교기념식장.
이날 조선대 김영달 총장은 공식석상에서 기념사를 낭독하는 대신 산하 각급학교 교장들과 함께 이 대학의 재단 이사장이면서 명예총장이던 박철웅씨 앞에 나와 맹세를 올렸다.
"맹세 -. 조국에 대하여 충성을 다하고 설립자님 정신의 구현을 위하여 신명을 다 바치겠습니다. 1982년 9월 29일. 조선대학교 총장 김영달"

광주의 비극을 토대로 탄생한 제5공화국의 압제에 전 대학이 신음하던 80년대,
호남의 대표사학이던 조선대학교의 교직원과 학생들은 또 다른 이중고에 시달려야만 했다.
"우리는 따르련다. 設立者님 精神, 祖國에 바친 限없는 忠誠"
조선대 교정 곳곳에는 붉은 천에 세로로 내려쓴 이런 문구의 초대형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고 이를 지켜보는 구성원들의 마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그런데 이들의 고통은 단지 플래카드를 바라보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 깃발 아래 총장을 비롯한 모든 교직원들은 자칭 설립자인 박철웅씨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을 해야 했고, 매일 아침 7시만 되면 어김없이 전교직원이 모여 군대에서나 있음직한 점호를 받으며 운동장을 돌았다. 이른바 박철웅식 길들이기로 회자되는 '충성 구보'의 시작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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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설립된 신흥 사학들이 대부분 뜻을 같이하는 일부 정치세력이나 특정 지주들의 토지 기부가 계기가 되어 시작된 것과 달리 조선대는 몇 가지 점에서 출발 자체가 특이했다.
우선 대학 설립 운동이 시도지사와 검찰총장, 각급 기관장의 전폭적인 협조 속에 이루어졌으며 심지어는 시골의 면장이나 이장까지 회원 모집에 나서는 등 호남 전역에 걸쳐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참여 인원이나 성향에서도 이 운동이 학력이나 계층, 빈부 격차에 제한을 두지 않고 모든 대중에게 개방됨으로써 호남의 대표성을 갖는 도민대학으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조선대학 설립의 기운은 이미 일제 시대 호남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민립대학 건립 운동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일제하의 민립대학 건립 운동은 조선총독부의 통제정책으로 성과를 이루지 못하다가 해방 직후인 1946년 5월에 대학설립동지회가 창립되면서 비로소 열매를 거두기 시작했다.

당시 호남을 기반으로 해 대학 설립 운동을 벌이던 주체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광주지방밥원과 지방검찰청 등 법조계의 판·검사와 변호사가 중심이 된 [법률전문대학 설립] 추진 세력, 다른 하나는 광주부윤(현 광주시장)이던 서민호와 박철웅, 그리고 취지에 공감하는 광주지역의 유지급 인사들이 주축이 된 [종합대학 설립] 추진 인사들이었다.
그런데 일제 치하를 경험한 이들의 공통점은 민족 국가 건설에 필요한 젊은 인재들에게 균등한 고등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나아가 국가발전에 기여하는 인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점에서 뜻을 같이하고 있었다. 서민호 시장과 실무를 맡은 박철웅씨 등의 노력이 있었지만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들이 힘을 한데 모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이렇게 뜻을 모은 설립 동지회는 이 지역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으며 46년 8월 광주 서중학교 강당에서 공식 발족되었다. 그리고 9월에는 설립동지회의 요청이 받아들여져 [광주야간대학원]이 설립 인가되고 그 해 11월에는 조선대학교로 명칭을 변경했다.
이때부터 조선대 설립동지회는 가입취지문(회원가입호소문)을 발표하고 회원 모집과 회비 모금 활동에 착수했다. 당시 전남지사로 자리를 옮긴 서민호와 이규정검사장이 공동으로 작성한 광고문이나 취지문, 각급 행정관서에 보낸 협조공문도 회원 확보에 큰 힘이 되었다.
이 당시 설립동지회원의 자격은 계층, 학력, 빈부의 격차를 가리지 않고 호남지역 전 대중에게 완전 개방되었으며, 모금 운동에 착수한 지 1년여만인 1947년 말까지는 7만2천여명이 설립 회원으로 참여함으로써 우리나라 민간 사학의 설립 역사로는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규모의 참여 인원과 열망이 결집되기에 이르렀다.
조선대 50년사 편찬위원장이던 주길순교수(조선대 명예교수, 국문학)의 증언.
"설립동지회는 법조계와 각급 행정기관의 공식 협조에 힘입어 호남의 시, 군, 면, 리 단위까지 조직이 확대되었으며 행정기관장이 모두 이사진으로 참여했어요. 설립 모금 운동은 당시 쌀 두말 값에 해당하는 1백원짜리 회원권을 판매하는 것으로 시작해 전라도 전역에 걸쳐 모금 운동을 전개한 것으로 압니다. 특히 광주야간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이 사각모를 쓰고 모금 운동에 나서서 가는 곳마다 뜨거운 호응을 받으며 적게는 30장에서 50장까지 회원권을 받아 등록금과 함께 학교에 제출하곤 했어요" 당시 상황은 학생 신분으로 회원권 확보에 열성을 기울여 학교로부터 건설특별공로상을 받았던 한춘홍(전문부 문과 1회 졸업, 조선대 국문과 교수 재직)의 회고에서도 잘 나타난다.
"1947년 5∼6월경 우리 일행은 전라남도 담양 방면에서 모금 운동을 펼쳤는데 담양군 대전면의 한 곳 들녘을 지나다가 감자를 캐는 농부들로부터 들밥을 얻어먹기도 하고 담양군청도 들리고 대전면 일대 가가호호를 방문했다. … 담양군에서 회원권 모집을 마치고 우리 팀은 도보로 남원으로 이동하였는데 맨 처음 찾아간 곳은 남원군수댁이었다. 이어서 남원경찰서에 들려 찾아온 취지를 설명하고 그들의 안내로 약간명의 회원을 모집했다. 그날 밤에는 경찰서장의 지시에 따라 경위 한 사람이 광한루 근처에 있는 요정으로 안내해 주연까지 받게 되었고, 그 경찰관은 기생들과 어울려 북을 치고 노래도 하면서 회원권까지 사주었는데 특히 그 자리에 동석한 기생들이 회원권을 사준데 대한 고마움은 두고두고 가슴에 남는다"

김영태(전문부 문과 1회 졸업)의 회고 역시 설립 운동이 전 도민의 참여 속에 이루어졌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해남군 삼산면 용두리에는 윤재춘군(당시 학생장)의 매씨 한정일 서장이 살고 있었는데 면의 유지이기도 한 한씨의 부인이 앞장서서 마을 전체를 동원해주다시피 했다. 그곳에서 인상에 남는 것은 마을의 잘사는 집이나 가난한 집을 막론하고 '대학설립'이라는 말에 누구나 호감을 가지고 현금이 없으면 쌀이나 김을 내놓으면서 이것을 가지고 가서 팔아 설립기금에 보태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눈물겹고 감동스러운 장면이었다"
이처럼 도민들은 현금이 없으면 장작이나 깨, 쌀 등을 주어 모금 운동에 보태었으며 1백원짜리 회원권이 쌓이면서 학교에서는 오동나무판으로 표지를 만들어 설립동지회 내역서를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조선대학 재단은 1948년 5월 26일 문교부로부터 정식 설립인가를 받게 되었다. 당시 학교 일을 보던 김택주(후일 조선대 총장 역임)가 문교부의 설립 인가장을 받아 기차로 돌아오던 날에는 각지에서 환영 인파가 모여 플래카드를 들고 송정리역에 나가 일행을 맞았으며, 광주역까지 퍼래이드를 펼칠 정도로 축제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처럼 어렵게 세워진 조선대학교의 설립 정신은 박철웅의 사유화 시도와 전횡적인 학사 운영 등으로 인해 점차 초기의 뜻이 퇴색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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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우리나라의 사학설립사에 있어서 조선대학만큼 감동적인 대학도 사실 드물다.
다른 대학도 설립시에는 다수의 뜻이 모아진 경우가 많지만 조선대학만큼 7만여명의 도민이 열성적으로 참여한 예는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특히 이 대학은 돈 많은 지주만이 아니라 밭에서 일하던 농부도 쌀과 깨와 닭 한 마리 나무장작까지 내놓고 참여했으며, 전 도민이 각처에서 사각모를 쓰고 다니며 모금운동을 한 학생들을 제워주고 먹여주고 교통편을 제공해주며 힘을 다해 주었던 것이다.
물론 이같은 대학 설립운동이 성공한 배경에는 이를 개척하고 추진해 나간 박철웅의 실천 의지와 지혜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 공은 결코 과소평가 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그런 역할을 맡았다 하더라도 조선대학은 어디까지나 전 도민의 피와 땀의 결집력으로 만들어진 민립대학이며 한 개인의 소유물이 될 수 없다. 더욱이 광주시민들이 5·18 사태 당시 암담하고 절망적이고 비통한 현실 속에서 눈물 흘리고 있을 때 그는 마치 이를 기화로 삼은 듯 짓밟혀진 대학에 절대권력자로 군림하며 학생과 교수들에게 자신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고 자신을 찬양하는 플래카드까지 내걸고 만만한 직원들에게 충성구보까지 시킨 것은 가히 광란에 가깝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는 5·18 학살을 주도한 전두환 정권이 힘을 잃고 민주화 운동이 빛을 보기 시작할 무렵 자기도 똑같이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당시에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취재지원=이일형 차장】
한국대학신문 기자 (news@unn.net) | 입력 : 00-10-17 오전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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