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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박철웅의 꿈과 야망, 그리고 조선대
조선대 설립을 주도해 나갔던 박철웅씨는 해방 후에 서민호 광주시장(당시 光州府尹) 밑에 있었다.
서민호씨는 해방 후에 광주시장을 맡고 고향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려는 왕성한 의욕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럴수록 인재의 빈곤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 같다.
사실 일제는 우리 민족의 고등교육을 억제하며 대학 설립 자체를 허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중학교도 지극히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향에 가더라도 중학교 정도를 나온 사람을 찾게되면 매우 반갑게 맞이하며 기용해 나갔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 같은 고향출신 박철웅씨는 매우 귀한 인재였다. 그는 일본의 와세다대 전문부와 메이지대 정치학부를 졸업하고 일본의 문교사회국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대학시절 성적표까지 추적했던 주길순 교수는 박철웅씨가 공부도 매우 잘한 인물임을 알아냈다.
서민호씨가 광주시장에 있으면서 그에게 총무과장이라는 중책을 맡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후 서민호씨는 전라남도 지사가 됐다. 그리고 박철웅씨를 도청의 운수과장으로 옮겨 놓았다.
당시의 운수과장은 지금과는 사정이 달랐다. 도청에서 전부터 쓰던 차량이 별로 없어서 미군의 트럭을 재주껏 끌어다 쓸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운수과장에는 유능한 인재가 필요했다. 박철웅씨는 매사에 저돌적이며 강한 추진력이 있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는 아마도 그쪽으로 발탁된 후 실력을 충분히 발휘해 나갔던 것 같다.
서민호지사는 전남의 발전을 위해 자주 회의를 열었다. 서지사의 최대 관심사는 무엇보다도 인재양성으로서 박씨 등이 앉은자리에서 이런 문제가 많이 논의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도청과 시청의 대학 출신 인사들이 참여한 대학설립 동지회가 만들어지고 '광주야간대학원(大學園)'이 등장하고 '조선대학'으로 이름이 바뀌어 나가는 과정을 겪게 됐다.
그런데 처음에는 광주야간대학원으로 출발했지만 서지사의 뜻은 광주의 지역적인 대학이 아니었다. 전국의 인재를 키우는 대학이 만들어지기를 바랬다. 그래서 '광주야간대학원'은 '조선대학'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고 한다.

서지사는 당시의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조선대학교 50년사』에서)

"… 광주시청 총무과장으로 과단성 있게 일을 잘 처리했던 박철웅씨는 도청 운수과장으로 발령을 받았고 그가 추진 중이던 조선대학교 건립진행에 관심을 갖고 온갖 힘을 다해서 뒤받침을 해 주었다. 건립기금 모집위원회를 조직하는데 도지사였던 나와 검사장 이규정씨의 이름으로 광고도 내 주고 각 군청에 지사 명의로 공문을 내서 후원을 하게끔 하였다.
이런 관계로 각계 인사들의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며 운수과장인 박철웅씨에게 각종 자재라든지 필요한 차량을 마음대로 사용케 해 주었다. 전남에 대학을 건립한다는 것은 뜻 있고 보람있는 일이었으며 무에서 유를 창조하겠다는 그 열망에 대해서 갈채를 보내고 싶을 만큼 공감을 가졌기 때문에 최선을 다했다. …"

조선대가 도민 전체의 참여로 설립돼 나간 것은 서민호지사가 앞장 선 이 같은 정책적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가능했을 것이다.
관과 민이 한마음이 되어서 이렇게 대학 설립에 열성적으로 참여한 것은 우리나라의 대학설립사에서 특수한 예에 속한다. 진정한 민립 대학이 수립된 것으로서 찬양할 가치가 있다.
그런데 그 후 이 대학의 이처럼 자랑스러운 의미는 점차 퇴색되기 시작했다.

○ ○ ○ ○

민립대학으로서의 과정을 거쳐 조선대는 대학의 기틀을 마련하고 체제를 정비하면서 종합대학으로 육성되었으나 6·25 전쟁의 발발로 인한 설립동지회 해체와 당시 학장이던 박씨의 정계 진출과 장기 외유, 60년대 4·19와 5·16으로 이어지는 정치 혼란기를 거치면서 시련과 침체를 거듭했다.
이 당시 박씨와 박씨 일가는 독단 경영과 부정 및 경제적 손실 등의 이유로 교수와 학생들에게 불신임을 받고 극심한 데모와 법정 소송, 맹휴 등으로 인해 학교 일선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5·16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63년 다시 총장으로 등극해 이전보다 확고한 경영권을 행사하며 개인 사유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대는 설립동지회를 바탕으로 한 설립정신이 왜곡돼 박씨 개인이 세운 대학처럼 비춰지기 시작했으며, 박씨 일가가 장기간에 걸쳐 학교 운영을 좌우하면서 점차 사유화 되어갔다.
특히 1980년 8월 이른바 광주사태를 수사하던 합동참모본부에 의해 비리 혐의로 다시 총장직을 물러난 박씨는 1986년 12월에 재복귀하기까지 거의 이성을 잃은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당시 그는 이사장직에 있으면서 명예총장이란 직함을 새로 만들어 사용하는 한편 설립자라는 명칭을 강조하다 못해 우상화하기에 이르렀다. 호를 '자양(慈陽)'이라 지어 스스로를 태양에 비유했고 학교 공문서에 자신의 업적을 선전했다. 이전의 총장실은 설립자실이 되었고 새 총장실은 부속실을 개조하여 사용해야 했다.
대운동장과 본관에는 붉은 바탕에 노랑색 태양을 그린 이른바 '자양기'가 물결을 이루었으며 초대형 현수막에는 '호남의 자랑 ! 피땀과 눈물로 설립된 창조의 용광로 조선대학교' '우리는 따르련다 ! 설립자님 정신, 조국에 바친 한없는 충성'이란 글귀가 새겨졌다.
그리고 이 구절은 학교신문 발행 때마다 빠짐없이 활자화되었다.
박씨는 81년 10월 8일 학원수호 결의대회를 열어 전교직원에게 공개적으로 '우리는 설립자님의 조국에 바친 한없는 충성을 본받아 국가와 학원의 안위를 위하여 진력할 것을 다짐한다'는 등의 결의를 공개적으로 하게 했다.

스승의 날이면 본교 출신 교수를 대표로 삼아 자신에게 사은사(師恩辭)를 올리게 했다. 82년 6월에는 '설립자기 전국 남녀대학생 크로스컨츄리대회'를 열었으며 83년 3월에는 '설립자님상 수여 신념영어발표대회'를 열기도 했다.

○ ○ ○ ○

80∼82년에 걸쳐 조선대에서는 43명의 교수가 재임용탈락, 파면, 사표 강요 등의 이유로 학교를 떠났다. 표면적인 이유는 부실한 연구와 강의 때문이라고 했지만 주된 이유는 박씨에 대한 반대파 교수로 낙인 찍힌 교수가 대부분이었다는 것이 당시 해직교수들의 증언.
박씨가 조선대에서 전권을 휘두르게 된 것은 오랜 기간 그가 대학 최고의 권력 자리에 있으면서 정보 정치를 폈으며, 집안의 친인척을 요직에 등용하고 이른바 친위세력을 운영하는 등 족벌 사학의 전형을 세워나갔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80년대 당시 이사장을 겸임하던 박씨 외에 그의 부인 정애리시씨는 수시로 학교운영에 관여했으며 박씨의 2남 박성섭씨는 이 학교 비서실장에 재직하면서 대명회라는 조직을 운영했다. 박씨의 조카사위인 최동윤교수 또한 체육대 출신 중심의 진압조직을 운영했다.
그런데 그가 40여년간 족벌 사학을 유지해 온 또 다른 배경은 그가 학계와 재계에 있어 호남 최대의 막강한 힘을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박씨가 소유한 재산은 14개의 단과대학과 2개 전문대학, 2개 남녀 고교와 2개 남녀중학교 및 조선대 학원 재단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박씨는 고려시맨트(주), 호남산업(주), 호남기계공업(주), 고려종합건설, 고려엔지니어링, 고려통운, 고려자원개발, 고려양행, 고려레미콘, 고려제지, 한국고려시멘트제조(주), 홍성산업, 진해산업, 남해산업, 동부레미콘 등 내로라하는 기업과 부동산을 소유한 명실상부한 오너였다.
이같은 사정은 박씨가 총장으로 다시 복귀하면서 한층 정도를 더해갔다. 그리고 87년 8월 5일 박총장과 비서가 공식성상에서 강치중 조선대병원장을 구타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국면으로 확대되어갔다.

사건의 발단은 학원 소요의 와중에서 9월 개학을 앞둔 박총장이 조기 면학분위기를 정착시키겠다고 방학 중에 전 학과에 걸쳐 시험을 강행한데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방학중에 치르는 시험에 응시율이 좋을리 없었다. 학생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시험거부에 들어간 것은 물론이다. 특히 의과대학의 경우 응시율이 저조해 총장의 심기가 좋지 않았다.
동료교수들에 따르면 당시 조선대민주총학생회건설 준비위원회 위원장인 백영권 군이 의대생이었다는 이유도 박씨가 강원장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게 된 이유였다는 것.
돌연 소집된 교무회의는 이같은 상황을 추궁하는 자리였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박총장은 돌연 강원장의 따귀를 때렸고 동행한 비서도 구타에 가세했다. 강원장은 즉시 사의를 표하고 회의장을 물러났지만 이같은 엄청난 일이 그대로 묻혀질리 없었다.

이 사건은 곧 수련의와 전문의들의 반발에 이어 사표 제출로 이어졌으며 박총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학생 간부들이 1백13일이라는 대학 초유의 장기농성에 돌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박총장을 중심으로 한 재단과 학생, 교수들의 힘겨루기가 끝없이 이어지고 급기야는 몇몇 교수들의 양심 선언이 이루어진 끝에 국회 및 교육부의 진상조사와 감사가 진행되면서 박씨 일가는 공식적으로 학교 운영에서 손을 떼지 않으면 안되었다.

새로운 전기를 맞은 조선대는 해직 교수 복직과 민주 총장 선출 등을 계기로 88년초까지 전개된 대학개혁운동을 통해 다시 태어났다. 대학구성원들의 노력과 지역주민들의 성원으로 모든 제도와 운영방식이 변화되면서 새로운 모습의 대학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대학교를 설립할 당시 주도적인 위치에서 실무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박씨였지만 그는 40여년에 걸친 장기 집권 속에 학교를 사유화하고 급기야는 개인 우상화의 길까지 접어들면서 파멸을 자초했으며, 결국 지난해 1월 세상을 떠남으로써 그가 그토록 집착했던 조선대학교에 다시는 돌아올 수 없었다


<다음 호에 계속> 【취재지원=이일형 차장】
한국대학신문 기자 (news@unn.net) | 입력 : 00-10-23 오전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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