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민주주의를 가치적 개념이라 생각하지만, 기능적 중요성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현대화와 함께 진행되는 민주주의는 새로운 제도와 기구의 필요성을 제기해 사회적 신뢰를 높이는 역할도 합니다. 민주주의야말로 사회가 발전하는 힘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역사의 종언’ 저자로 유명한 프랜시스 후쿠야마 미국 존스홉킨스대 교수<사진>가 24일 이화여대를 찾아 ‘21세기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을 주제로 특강했다. 후쿠야마 교수는 이화학술원 강좌로 기획된 이 강연에서 “민주주의와 현대화는 높은 상관성을 갖는다”면서 “민주주의는 추상적 가치 뿐 아니라 충분한 기능적 함의도 지닌다”고 강조했다.
후쿠야마 교수는 “국가마다 현대화 방식은 다를지언정, 그 과정에서 겪는 변화 자체는 동질적”이라며 “현대화의 결과인 시민사회의 부상이 대표적 사례”라고 말했다. 그는 “전근대적 위계화를 깨뜨린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와 현대화는 연동된다. 민주주의적 제도나 절차의 생성은 현대화의 산물로, 빠른 경제발전에 성공한 중국도 이 단계를 밟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현재의 민주주의에 대한 4가지 도전으로 ▲‘정체성의 정치’에 기반한 이슬람 극단주의 ▲국가 수준의 민주주의 부재 ▲세계화와 맞물린 빈곤 문제 ▲과학기술 통제의 어려움을 꼽았다.
후쿠야마 교수는 “이슬람 극단주의와 결합한 테러리즘 탓에 무슬림 국가에서는 진정한 자유 민주주의가 불가능할 것이란 견해가 많다”면서 “그러나 이는 옳지 않다. 터키나 인도네시아 등 민주주의가 성공적으로 정착한 무슬림 국가도 있다”고 반박했다.
이른바 ‘정체성의 정치’ 관점에서 이슬람 극단주의를 해석해야 한다는 것. 그는 “9.11 테러 등에 가담한 폭력적·급진적 이슬람주의자들을 잘 살펴보면, 유럽이나 미국에 이주한 이슬람인이 다수임을 알 수 있다”면서 “이는 이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의 혼란’이라는 보편적 사회문제의 하위개념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국제사회에서의 민주주의 부재도 꼬집었다. 후쿠야마 교수는 “이라크전 등 최근 미국의 움직임은 국제사회에 대한 책임감 있는 행동으로 보이지 않는다”면서 “유일한 강대국인 미국으로 인해 발생하는 힘의 불균형, 호혜성 부족 등이 국제사회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국가 내에서 민주주의적 제도와 기구를 자율적으로 만들어내는 것과는 달리, 국제사회 수준에서는 이러한 메커니즘이 정착되지 않고 있다”면서 “실질 영향력이 부족한 기존 국제기구를 현실적 역학관계를 반영하고, 동시에 이에 제동을 걸 수 있는 방향으로 바꿔나갈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새로운 국제기구의 모델로 6자 회담의 가능성을 높게 평가했다. 후쿠야마 교수는 “수년간 북한문제를 중점적·주체적으로 논의해온 6자 회담은 미국·러시아 등을 아우르면서 동북아 지역 안보를 다루는 새로운 상임기구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또 “빈곤 문제는 자원 부족보다는 기본 공공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정부가 제기능을 못한 측면이 크다. 민주적 제도와 기관이 갖춰지면 점차 해결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과학기술 발달을 올바르게 통제하지 못하면 삶의 근간이 흔들린다. 이에 대한 긴밀한 국제사회 공조와 같은 민주적인 정치 과정이 선행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어 “민주주의에 대한 4가지 도전을 풀어내는 해답은 아직 명확히 제시되지 않았다. 다만 이러한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고, 함께 해결하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이날 강연에는 시험기간임에도 이화여대 학부생과 대학원생 500여명이 몰려 뜨거운 관심을 나타냈다. 이화학술원 해외 석좌교수를 맡고 있는 후쿠야마 교수는 “교수로 초빙 받고 이화여대를 늦게 찾은 감이 있다. 내년에는 더 많은 시간을 이화학술원에서 보내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혀 향후 활발한 교류 강의·연구활동을 다짐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