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 수인사를 나누는 과정에 필자가 철학을 가르치는 대학교수임을 알게 되면 상대는 놀라워하며 경의를 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대화를 조금 더 진행하다 보면 그 속내에는 철학을 공허한 전공, 비생산적 전공, 심지어는 말장난이나 하는 전공 등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대화에서 필자는 그분들이 경험한 철학 교양교육의 내용을 물어 보게 된다. 그래서 그들이 받은 교양철학 수업 내용이 출신학교를 불문하고 대체로 지나치게 편협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한 학기 내내 특수한 철학분야만 강의해 뭔가 심오한 분위기만 연출하고 전문용어 한두 개만 기억하게 하고 끝낸 경우도 많았다.
그런 이야기를 듣노라면 오늘의 인문학의 위기는 과거 인문학자들의 잘못된 교양교육의 결과라는 생각마저 들게 되었다. 그래서 필자는 인문학에 경쟁의 논리를 도입하고 양적인 측정방법을 동원해 어떤 형태의 발전이라도 이끌어 내려는 노력에 대해 그다지 반대하지 않는다.
박사학위 직후 학문적 포부가 넘치던 시절에 참여했던 학제적 토론 모임이 있었다. 소위 명문대 유망학과 중견교수의 두툼한 논문 발표가 있었는데, 필자가 보기에 성실하게 쓰인 유익한 논문이기는 해도 대단한 논문은 아니었다. 그는 휴식시간에 양적 평가제도를 도입하는 데 반대하며, 수년간 단 한 편의 논문을 써도 질적으로 뛰어나면 된다는 논리를 폈다. 나는 양적 증가가 질적 변화를 낳을 수도 있으며, 논문의 두께가 논문의 질을 좌우하지 않음을 역설했다. 그 결과 그 모임으로부터 필자는 팽을 당했다. 그 후 십 년 정도 지났지만 그분의 학문적 명성은 들어 보질 못했다.
사실 학문은 엘리트주의적이다. 진리의 탐구는 진리의 근접 정도에 따라 대접받아야 한다. 하지만 학문의 다양성도 중요한 가치이므로 질적 평가 기준도 다원성을 가져야 한다. 지난해 한국에서 열린 세계철학대회에서는 개인 논문만도 1400편 이상이 발표됐다. 이 가운데 세계적 학자들의 수십 편의 논문 외에도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의 철학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담아 낸 논문들도 적지 않게 있었다. 후자의 논문들은 소위 '세계적' 학자들의 경우와는 다른 기준을 적용할 때 진가가 드러난다.
이런 점에서 학문의 민주성은 유의미하다. 강의 차원에서 민주성은 특별히 강조되어야 한다. 대학원 교육이 학문의 이상을 지향한다면 학부교육, 특히 교양교육은 피교육자를 지향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학문적 고고함을 티내며 피교육자를 고려치 않은 교수방식은 오만을 넘어 무례가 된다.
지난 십여 년 동안 대학 간의 경쟁 방식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논문 수보다는 인용지수가 더 중요해졌고, 연구와 교육이 동시에 강조되는 가운데 이제는 국제화가 각 학과단위에서도 요구된다. 그런데 우리 대학제도 자체는 여전히 성격적 다원화를 이루어내지는 못하고 있다. 독일, 영국, 프랑스의 대학이 각각 얼마나 다른 성격을 갖고 있는가. 그리고 덩치 큰 나라인 미국에서는 종합대학에서 작은 리버럴 아트 컬리지까지 규모의 다양성과, 학기제·쿼터제 등과 같은 제도적 다양성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는가. 그런데 우리 대학들은 큰 대학이나 작은 대학이나 그 같은 다양성을 전혀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교육은 백년대계이므로 진짜 학문적 경쟁을 위해 이제는 장기적이고 과감한 제도적 개혁도 시도해 볼 만한 때가 되지 않았는가? 중간고사 이후 한 주간의 브레이크를 갖는 제도를 시행하는 대학도 보고 싶고, 아예 한 학기를 둘로 쪼개는 쿼터제를 하는 대학도 보고 싶다. 400~500명이 듣는 대형 강의와 7~8명이 듣는 소형 세미나가 공존하는 모습도 보고 싶다. 대학들이 이 같은 진정한 성격적 다양화를 이루며 민주적 균형을 이뤄 갈 때 사회는 진정한 경쟁력을 갖추리라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