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서울대학교에서 공직선거출마교수에 대해 휴직을 가능하게 하는 내규 초안을 마련했다가 여론에 밀려 결국 재검토하기로 했다. 대학과 학문이 여론을 이끌기는커녕 오히려 그만 못한 모양새가 되어버린,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지금은 해프닝처럼 되었으나 이 건은 조만간 다시 문제가 될 것이다. 따라서 대학교수의 정치참여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성리학의 영향 하에 있었던 우리의 전통을 반추해 보면 학문과 정치는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학문을 연구하던 이가 왕의 부름을 받으면 공직에 나섰고, 물러나게 되면 후학을 양성했다. 학문하는 것은 공직으로 나가는 관문이었고, 학문의 깊이가 정치적 역량으로 가늠되기도 했다. 이 영향은 지금도 우리에게 있고, 또 사실상 학문이 정치 사회현실과 유리될 수 없기에 학자가 관심을 갖고 참여적 태도를 갖는 것은 존중되어 왔다. 하버마스의 말처럼 모든 인식에는 이미 어떤 주도적 관심이 개입되어 있고, 따라서 순수한 이론에도 근원적으로 사회적 관심이 개입되어 있다. 따라서 지금 문제가 되는 폴리페서의 경우는 교수의 정치참여 자체가 아니라 참여의 방식에서 짚어볼 문제다.
우선 대학교수는 학문적 전문인이므로 참여는 전문성을 담보해야 한다. 전공 내용이 국가에 직접 도움 될 수 있고, 대학 경영의 탁월한 역량이 있는 이가 국가 경영에 부름 받을 수 있다. 전자의 경우 임명직 혹은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전문성을 발휘의 요구를 받을 때 이를 폴리페서로 비난할 수 없다. 후자의 경우 대학 경영이 학문적 전문성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전자와 동일하지는 않으나 그 경험을 국가 경영에 활용할 것을 요구받을 경우도 비난할 수 없다.
다음으로 고려할 사항은 학문의 이상성이다. 학문은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실과 다른 모습을 제시하는 이상성을 갖고 있다. 이러한 이상성은 현실에 대한 비판에 활용될 수도 있고, 또한 현실변화의 과정에 능동적으로 개입하는 데 활용될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 교수는 현실의 여러 문제에 대해 학문의 이상성을 바탕으로 접근하여 시민사회운동의 형태로 비판적 의사를 피력하는 활동을 할 수 있다. 이는 직업으로서의 교수직과, 교수의 본분인 연구 및 교육의 책무 내의 활동으로 간주될 수 있다. 물론 연구와 교육을 완전히 등한시 하고 이러한 시민사회운동에 참여한다면 문제겠지만 사실상 그렇게 되기는 어렵다. 시민사회운동의 여러 직책에는 보수가 주어지지 않으며 오히려 경제적인 희생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자의 경우, 즉 교수가 선출직 공무원으로 활동하기를 원하는 경우는 이와 다르다. 이때 교수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직업을 변경하려는 태도를 가진 것이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는 교수직에서 물러나는 것이 대학과 학생에 대한 예의이자 의무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다양한 변수가 존재한다. 시민사회참여도 정치적 의도를 갖고 할 수 있고, 임명직에 부름을 받는 모양새를 갖추어도 실상은 이를 위해 권력에 야합하고 학문성을 저버리며 곡학아세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사적인 차원에서 권력 향유와 이익 추구를 위한 정치 사회적 활동을 추구하는 폴리페서를 가려내는 것은 형식적 요건만을 규정하는 법규만으로는 어렵다.
그 대안은, 해당 대학에서 학문적 양심을 대변할 수 있는 존경받고 인정받는 학자들로 구성된 위원회를 통해 판단을 받고 처리하는 것, 그리고 이러한 위원회의 판단을 사회에 알려져 건전한 지식인 사회에서 평가받게 하는 이중적 평가의 방법이다. 만일 이러한 위원회의 판단과, 이 판단에 대한 지식인 사회의 판단을 우리가 신뢰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이 같은 논의 자체가 무의미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느 대학이든 그 대학을 대표하는 지성이 존재해야 하며, 그의 존재가 대학의 학문성과 학적 양심을 대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 없이는 교수의 정치참여의 문제는 권력의 영향 하에서 계속 공전(空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