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이요? 두렵진 않았어요. 문제는 시차였는데 그마저도 정신없이 환자 보느라 잘 몰랐습니다.”
진도 7.0 규모의 강진이 휩쓸고 간 자리, 남아있는 여진의 공포, 평범한 시민이 언제 폭도로 변할지 모르는 상황…. 김승주 고대의료원 교수는 그곳, 아이티에 있었다.
고대의료원은 지난달 19일부터 31일까지 의사 4명·간호사 4명·약사 1명·행정지원인력 3명·코디네이터 1명 등 13명의 자원자를 아이티에 파견했다. 독자적인 민간의료기관으로는 최초였다. 김 교수는 이번 의료봉사단의 단장을 맡았다. 그는 파키스탄에 의료봉사 갔던 경험을 살려 이번에도 선뜻 나섰다.
아이티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인천에서 미국으로 미국에서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떠난 지 이틀 만에 도미니카 공화국에 도착해보니 짐이 하나 부족한 거예요. 미국 마이애미 공항에서 진료기구가 든 짐 중 하나가 안 실렸더라고요. 다음날 그 짐을 찾아 다행이었죠. 도미니카에서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로 가는데도 7시간이 넘게 걸렸습니다.”
본격적인 진료를 시작한 날에는 환자를 보느라 여진이 온 줄도 몰랐다. “마당에 환자들이 빼곡했습니다. 그런데 정신없이 진료하다 보니 환자들이 다 없어진 거예요. 나중에 알고 보니 사람들이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방송에서 지진이 다시 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고 하더라고요.”
김 교수는 흩어진 환자들을 찾아 짐을 쌌다. 간호 학원 마당에 텐트를 치고 진료를 다시 시작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찾아오는 환자만 돌볼 수 없어 봉사단은 지진피해가 극심한 난민촌으로 왕진을 다니며 아이들과 노인들을 치료하기도 했다.
머무는 동안 고대의료원 봉사단은 1000명이 넘는 환자를 치료하며 20건의 수술을 집도하기도 했다. 그중에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새 생명을 탄생시킨 일도 있었다.
“24일 새벽 5시쯤 제왕절개수술을 할 의사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한국·미국·프랑스 등 16개 진료팀이 묵고 있던 곳에 산부인과 의사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다들 선뜻 나설 상황이 아니었죠. 요청한 쪽에서도 저희에게 마지막으로 요청하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저희 단원인 박관태 외과 교수가 나섰습니다. 그러자 미국·독일 의사들도 돕겠다고 하더라고요.”
다국적 팀이 수술한 지 40분이 지나자 마침내 여자 아기가 울음을 터뜨리며 세상에 나왔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은 기적과 같은 일에 환호했다.
위기 상황에는 국경도 없었다. “여러 나라에서 온 의료진은 오후 8시면 모여서 회의를 했어요. 다른 나라 의료팀에서 약이 부족하다고 하면 주기도 하고 서로 필요한 것 있을 때 연락할 수 있게 연락처를 교환하기도 했습니다.”
보람된 순간도 있었지만 안타까운 상황이 더 많았다. 수술할 기술을 가진 의사들은 있는데 의료기관이 정상화되지 않아서 수술하지 못했던 일도 있고 장비가 갖춰지지 않아 겨우 수술한 상황도 있었다.
탈장수술은 한국에선 비교적 가벼운 수술. 그러나 의료기관이 전부 마비되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아이티에서는 힘겨운 수술이었다.
“침대가 없어 환자를 매트리스에 눕히고 쪼그리고 앉아서 수술해야 했습니다. 낮인데도 전기가 없어서 컴컴했지요. 마침 제가 집에서 가져온 등산용 헤드램프가 있어 취재 온 기자 머리에 씌운 다음에야 겨우 수술 시야를 밝힐 수가 있었습니다.”
김 교수는 4시간 정도 밖에 잠을 못자며 의료봉사에 힘썼지만 민간의료기관 봉사로는 한계가 있었다. “좋은 장비로 우리 병원에서 수술하는 것처럼 수술했으면 좋았을 텐데 대학병원에서 그것을 다 마련하기 어렵죠. 국가적인 도움이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요.”
어느덧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 김 교수의 머리엔 검은 머리보다 흰 머리가 더 많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젊다. “재난이 일어난다면 다시 나설 것이냐”는 마지막 질문에 그는 소탈하게 웃으며 답했다.
“(재난현장에) 안 가본 사람보다 아무래도 가본 사람이 더 낫지 않겠어요. 가야지요. 또 가야지요.”
■ 김승주 교수는...
서울에서 출생했으며 고려대 의과대학과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고대안산병원부원장을 역임했으며 상부위장관외과 과장을 지난해까지 맡았다. 현재 고대안산병원에 재직 중이며 위암·상부위장관·탈장 전문의다.
사진 (위) 한명섭 기자,(아래)고대의료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