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세기 새 밀레니엄에 들어서면서 인류의 문명은 새로운 지평을 열어 가고 있다. 이 문명사적 전환의 진원(震源)은 뜻밖에도 디지털 기술(Digital Technology)에 있다. 디지털 기술은 인간의 사고기능을 무제한 강화시키는 인공지능(AI) 기술을 낳았고, 또한 인간의 감각적 지각 영역을 무제한 확장시키는 통신기술을 낳았다. 그런데 정작 디지털 기술의 혁명성은 이 두 기술, 즉 사고·정보기술(IT)과 감각·통신기술(CT)을 ‘정보통신기술(ICT)’이라는 하나의 기술로 융합한 데 있다. 이 두 기술의 융합은 사유와 지각의 융합 및 호환을 비생명적·물리적 공간 속에서 현실화시키기 때문이다.
사유와 지각을 융합·호환하는 이 기술은 시공적 제약을 뛰어넘는 유비쿼터스 커뮤니케이션(Ubiquitous Communication)을 가능하게 만들고, 역시 시공적 제약을 벗어나는 가상현실(Virtual Realty)을 출현시켰다. 이들에서 보듯, 자연적·물리적 세계의 시간적 순차성(順次性)과 공간적 배타성을 극복하는 이 기술은 거리의 소멸, 시간의 증발을 결과로 가져와, 사람들로 하여금 욕구충족의 순차성과 단계성을 뛰어넘어 동시적·총체적 욕구충족의 가능성을 기대하게 만들고, 이른바 지식산업은 이를 현실화시킬 수 있는 알고리즘(Algorithm)의 개발에 주력한다. 기술들이 융합하고 이를 토대로 산업들이 융합하는 현상은 불가피한 것이다. 융복합은 이제 시쳇말로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이렇듯 세계체험의 근본이 되는 시공체험 양식이 달라지고, 이에 따라 인간의 욕구 구조가 변모하고 그 욕구충족의 방식이 달라지는 마당에 어찌 이에 봉사하는 지식의 지형이 달라지지 않겠는가? 지식사회를 선도하는 대학에서 교육과 연구의 내용이 어찌 달라지지 않겠는가? 지식도 융복합적 성격을 띠는 방향으로 변모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교육 또한 융복합적으로 이뤄져야 함은 당연하다.
교육은 이제 기성 지식의 전달·전수가 아니라, 지식을 스스로 창출·응용·적응할 수 있는 기초능력을 길러 주는 일이어야 한다. 새로운 정보를 산출할 수 있는 창의적 사고력, 엄청난 양의 정보 가운데서 적실성 있는 유용한 정보를 선별할 수 있는 비판적 사고력, 자신의 사유내용을 공동체 구성원과 공유할 수 있는 사회적 의사소통 능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능력을 발휘해 핵심 문제를 찾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폭넓고 깊이 있는 안목과 통찰력, 종합적 사고능력을 함양하는 일이 돼야 한다.
정보사회에서 우리가 해결해야 할 중요문제는 대체로 여러 지식분야에 걸쳐 있는 복합적 문제다. 문제들이 함께 얽혀 있어 이를 총체적으로 조망하는 능력이 없으면 부분에 관한 전문지식도 무력해지기 쉽다.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다학문적·학제적 능력이 요구되며 이를 바탕으로 문제연관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안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점은 분업·분화가 생산성을 높이던 산업화시대와 달리 기술과 산업의 융복합이 진행되고 있고 여기에 여러 영역의 지식과 능력이 복합적으로 동시에 요구되는 오늘의 현실에서 매우 절실하다.
그러니 이러한 교육의 기초가 되는 교양교육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특정분야의 전문지식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런 전문지식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스스로 창출해 적실성 있게 활용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넓은 사유의 지평과 기본적 지적능력이 갖춰져야 한다.
이제 교양교육에 대한 천박한 통념을 갈아엎을 때가 됐다. 대학에서 교양교육은 '하면 좋지만 안 해도 되는' 여분의 교육이 아니다. 교양괴목은 이제 내용도 상식적인 것이고 학술성이 있다 해도 초보 수준이어서 젊은 강사가 맡아도 되는, 학생으로서는 공부 안 해도 학점 따는 그런 과목들이어서는 안 된다. 기초학문의 깊은 탐구성과가 담겨 있고, 전공과목보다도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한 과목이어야 한다.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험한 무한경쟁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우리 대학사회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양교육이 어떤 내용으로 채워져야 하는지 숙고하고, 이의 실현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