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지난 10일 고려대 캠퍼스에 나붙은 한 장의 대자보가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자발적 퇴교를 결심한 고려대생 김예슬 씨의 선언은 대학(大學)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던졌다. “작지만 균열은 시작되었다”던 김 씨의 말처럼, 사람들은 대학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론화하기 시작했다.
▲고려대생들이 발길을 멈추고 김예슬 씨의 대자보를 읽고 있다. <사진 제공= 고대신문>
■고려대 캠퍼스에 이어진 대자보 릴레이= 김 씨의 대자보가 붙은 뒤 고려대 캠퍼스에는 저마다의 의견을 담은 대자보가 이어졌다. 곧바로 이화여대생 심해린(경영·07) 씨가 “<김예슬 선언> 앞에 교수님들의 양심을 묻는다”는 제목의 대자보를 써 붙였다. 심 씨는 “지지건 비판이건 입장을 밝히고, 진리라고 믿는 것을 실천으로 보여달라”고 촉구했다. 이어 인터넷 포털에 ‘김예슬 선언’(cafe.daum.net/kimyeseuls) 홈페이지를 만들기도 했다. “한 인간이 자신의 생을 걸고 피워올린 불씨가 사그라들지 않기를 바란다”는 게 그의 변이다.
많은 대학생들의 글이 이어지는 가운데 눈에 띈 것은 스스로를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비정규직 노동자’라고 소개한 김무준(23) 씨의 대자보였다. 그는 “연장 수당조차 없는 회사에서 한 달에 110만 원을 받으며 일하고 있다. 근무시간은 12시간에 가까워졌으며 퇴근이 언제인지도 알 수 없다”면서 “나도 대학 가고 싶다. 또래 친구들도 사귀고 (꿈인) 디자인 공부도 하고 싶다. 남들 다 하듯이 살아보고 싶다”고 적었다.
얼핏 반대말로 들리지만, 사실 “대학을 그만둔다”와 “대학 가고 싶다”는 말은 비슷한 맥락에서 나왔다. 양쪽 모두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기 때문이다. 김예슬 씨는 대학에서조차 치열한 경쟁에 내몰리는 것을 거부했다. 대학의 틀을 벗어나도 상황은 더 나빠진다. 김무준 씨 역시 대학 졸업장 없이는 저임금과 과도한 업무량에 시달리며 비정규직으로 살아야 하는 현실에 반발한 것이다.
■“본모습으로 돌아가자” vs “구조를 바꿔야”= 젊은이들의 외침이 계속되자 대학 교수들의 응답도 시작됐다. 강수돌 고려대 교수(경영학)는 “교수님들의 양심을 묻는다”는 심 씨의 대자보가 공개된 후 “고려대 교수로 ‘김예슬 선언’ 앞에 부끄럽다”고 썼다. 그는 “김 씨의 선언에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면서 “이 ‘불편한 진실’을 누가 까발릴 것인가 하는 문제였을 뿐, 사실 ‘자격증 브로커로써의 대학’이란 비판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김진석 인하대 교수(철학)는 ‘대졸자 주류 사회’를 비판했다. 그는 “대학은 창조적이지도 않은 비싼 교육의 대가로 졸업장을 파는 사업을 하고 있다. 맹목적 대학 입학과 졸업을 멈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과거에는 대학을 나오면 괜찮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어 대졸자 주류 사회의 시스템이 굴러갔지만, 지금은 대학을 졸업한 다수가 실업 상태”라며 “게다가 대졸 실업에 가려 더 심각한 고졸 실업 문제마저 간과되고 있다. 이 체제는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김무준 씨의 글에 대답한 셈이 됐다.
대학 교육의 대안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쪽과 “구조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쪽의 입장차가 드러났다. 강 교수는 “대학의 기업화와 개인주의화가 문제다. 공동체 생활과 함께 스스로 배우고 싶은 것을 찾아 배워 ‘광장의 대학’을 만들어야 한다”는 ‘정론’을 피력했다. 반면 김 교수는 “이명박 정부의 방침에도 일리가 있다. 절대 다수가 대학에 진학하는 구조를 깨뜨려야 한다”면서 “고교 수준에서 직업교육을 하는 방식을 도입하고, 고교만 졸업해도 생활할 수 있도록 시간당 최저임금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소통 공간 확보해 대학 변화 ‘밑거름’으로= ‘김예슬 선언’의 수신인이었던 대학생들은 당장의 대학 구조 변화보다 소통 가능성의 확장에 주목했다. 고려대생 박원익(경제·06) 씨는 “김예슬 씨의 자퇴 선언을 계기로 ‘말하게’ 된 것은 자신을 대변할 변변한 단체 하나 없었던 보통의 젊은이들”이라고 규정했다. 같은 대학 이지훈(한국사·06) 씨도 “대자보 하나 붙이지 못했던 학생들이 공론의 장에 뛰어들고 있다. 각각의 입장과는 별개로, 김예슬 씨로 인해 어렵게 열린 공론의 장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대학 교육이 변화해야 한다는 인식 뒤에는 80%를 넘긴 대학 진학률이 자리잡고 있다. 대학 본연의 모습을 되찾자는 쪽도, 대학 구조를 바꾸자는 쪽도 문제가 높은 대학 진학률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대학을 졸업해도 ‘차별화’가 불가능한 상황이 김예슬 씨가 비판한 대학의 모습으로 이어졌다는 얘기다. 해법은 각각 다르다. 대학 구성원의 자발적 의식 변화가 강조되는 가운데 대학 진학률 자체의 감소를 비롯한 대학과 사회구조의 변화 필요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미시적 방법론도 거론된다. 초·중·고교에서 상대적으로 활발한 대안학교 모델도 그 한 방법이다. 대학 진학률이 높아져 ‘의무교육’ 수준에 근접한 대학에서도 ‘대안대학’ 형태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것. 제한된 형태이긴 하지만 온배움터(구 녹색대학)의 사례가 있다. 대학 내부에서도 ‘줄 세우기’ 방식을 벗어나 다양하게 학생들을 뽑아 교육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윤호 동국대 입학처장은 “농·어촌학생특별전형으로 선발된 학생들이 오히려 대학에서 더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면서 “선발 방식과 교육 시스템이 함께 변화해야 함을 입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