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시비가 학문활동에 대한 폭력으로 치닫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지난 30일 노무현 대통령이 한나라당의 반발을 무릅쓰고 서 교수를 국정원 기조실장으로 임명하자 한나라당은 전면전이라도 벌일 태세로 잔뜩 격앙돼있다.
비단 한나라당만이 아닌 민주당의 일부 의원까지 가세하고 있는 학자출신 공직후보자에 대한 색깔몰이는 지난달 22일 국회의 국가정보원 인사 청문회에서 본격화했다.
겉으로는 ‘이념대결’의 형국으로 내비치고 있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두 당의 당내 세력다툼과 결부돼 있고 향후 정국주도권과도 연계돼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결국 지난 29일 일부 정치세력의 정략적 이익을 위해 학자가 희생양이 되게 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학술단체협의회 등 교수·학술단체들이 “시대가 어느 때인데 학자의 글을 색깔 공세의 자료로 삼느냐”며 팔을 걷어붙이고, “일부 정치세력이 정략적 이해를 위해 서 교수 등 개혁성향 학자들을 근거없는 색깔론으로 공격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나섰다.
학문활동 멋대로 폄하 심각
이와 같은 학계의 반발은 국정원 인사청문회 당시 쏟아져 나온 서 교수 등에 대한 일부 정치인들의 진술에서 예고됐다.
당시 국회 정보위 소속 의원들은 교수 등 일선 연구자들에 대해 심각한 편견과 경멸감을 갖고 있음을 드러냈고, 최소한의 논리도 갖추지 않거나 윽박지르기식의 심문을 감행해 논란이 됐다.
당시 발언의 내용을 살펴보자.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은 당시 증인으로 나온 서 교수에게 “논문 뿐만 아니라 친북좌파 경향으로 분류돼 있는데 증인이 국정원에 들어가면 국정원 조직 내가 혼란스럽다”고 말했다.
같은 당 정형근 의원은 증인으로 출석한 이종석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차장과 서 교수에게 번갈아 질문을 던지며 “저 분들이 국가안보를 책임진다니 이 나라가 큰일났다”며 안보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서 교수와 이 차장이 북한문제에 대한 학술적 분석과 견해를 제시하며 소신을 굽히지 않자 정 의원은 “서 교수는 공부를 많이 해서 북한을 많이 아는 것으로 자부하는 것 같은데 정보를 잘못 알고 있다”고 두 증인을 힐난한데 이어, 민주당의 천용택 의원은 “대통령에 대한 조언은 장난이 아니다. 나라는 박사학위 논문으로 경영하는 게 아니다”며 노골적으로 비꼬았다.
또 “교과서로 읽어서 아는 것이 베테랑이 아니다”, “강단에 선 것외에 다른 일을 한 적 있느냐” 등 학자로서의 두 증인에 대한 인신공격성 공박을 이어갔다.
국정원 개혁과 개혁을 수행할 능력을 가려야 할 청문회는 ‘친북성향’을 검증하는 장으로 변했고 아카데미즘은 처참하게 농락당했다는 것이 청문회를 지켜본 이들의 중평이었다.
특히 학자적 자존심이 걸린 학술활동에 대해 ‘경험의 결핍’을 앞세워 폄하하는 독선적 모습과, 냉전수구의 잣대로 학술활동을 재단하는 단순논법은 한국 정치의 후진성을 보여준 사례가 됐다는 쓴소리도 있었다.
김연철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는 “가장 오른쪽에 서서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왼쪽에 서있으면 모두 ‘친북좌파’로 모는 행태를 보는 것 같다. 북한 역사 연구의 가장 대표적인 실증적 연구로 평가받는 그의 박사논문을 인사 청문회에 참가했던 국회의원 중 한 사람이라도 읽어보았다면 그런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잇따른 학계 색깔시비, 학문활동 제약 심각
학계 인사들에 대한 색깔 시비는 연원이 깊다. 가까운 역사를 일별해 봐도 그렇다.
학술심포지엄 논문을 문제삼아 검찰이 출두를 요청했으나 학술단체들의 반발이 일자 무혐의 처분된 서관모 교수(충북대) 사건, 김영삼 정부 초기 대표적 개혁인사로 통일부총리로 등용됐던 한완상 전 서울대 교수(현 한성대 총장)에 대해 일부 언론이 집요한 색깔 공세를 펴 결국 낙마한 93년 한완상 사건. 이후 한완상은 김대중 정부에서 교육부총리를 맡은 후에도 여론몰이식 마녀사냥의 대상이 돼 “한완상이 말하면 죄다 빨갱이”라는 말을 회자시킬 정도였다.
이밖에도 94년 박홍 전 서강대 총장의 ‘주사파’ 발언 이후 닥친 공안정국에서 강의교재로 사용하던 저서가 이적표현물로 몰려 재판을 받았으나 결국 승소한 ‘한국사회의 이해’ 사건, 무엇보다 '20세기 마지막 레드 헌트'로 통했던 98년 최장집 사건 등이 그 대표적 예이다.
학계에 대한 이런 색깔론 공세는 창조적 상상력을 옥죄고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검토를 제약함으로써 학문의 발전뿐 아니라 전체 사회의 전망을 수립하는 데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동국대 조은 교수(사회학)는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교권을 보호하는 것인데 그런 맥락에서 색깔론은 교권과 학문활동을 심각하게 위축시키는 효과를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원덕 국민대 교수는 서동만 교수의 대북포용정책 기조를 다룬 보고서에 대해 “이런 정도에 친북이라는 딱지를 붙이면 우리 내부에 정책 선택을 제한하는 결과를 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증거 없이 터뜨리고 과장하기…전형적 메카시즘 수법
무엇보다 서 교수에 대한 ‘사상검증’이 구체적 증거나 지적 토론이 아닌 센세이셔널리즘·과장·단순화·독설을 통해 이뤄지는 점과, 언론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일부 거대언론이 이를 여과없이 지면에 대거 반영하면서 작동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과거보다는 부드러워졌지만 구체적 내용과 증거 없이 이뤄지는 ‘빨간색 딱지붙이기’를 언론이 확대재생산한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메카시즘 수법이라고 말한다.
지난 50년대 미국에서는 매카시라는 미국 상원의원이 “미 국무성에 당원증을 가진 공산당원이 2백5명이나 있다”고 폭로하자, 미 언론들이 확인없이 이 말을 대서특필하면서 ‘빨갱이 사냥’ 광풍이 몰아쳤다.
그러나 매카시의 말은 나중에 새빨간 거짓말임이 탄로났다.
그런 점에서 지난 94년 박홍 총장에 의해 촉발된 주사파 정국도 똑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전국 14개 대학 총장들이 만난 자리에서 박 총장은 “학생운동권 배후에 사노맹, 사노총, 김정일이 있다. 그들은 북한 ‘로동신문’이나 팩시밀리를 통해 지령을 받는다”는 발언을 했다.
박 총장의 이 발언으로 인해 공안정국이 형성됐고 무수한 사람들이 용공음해와 연행을 당해야 했다.
일부 보수언론은 이를 그대로 받아적어 색깔시비를 증폭시켰다. 그러나 명백한 증거를 갖고 있다던 박 총장은 별다른 증거도 제시하지 못했고, ‘심증’만 있을 뿐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대학가만 한차례 홍역을 치른 채 마무리됐다.
이런 점에서 냉전과 증오의 논리에 기댄 정치인들과 국가안보를 상업주의에 활용하려는 일부 언론을 색깔론의 주범으로 지목하는 목소리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한 정치학자는 색깔론이 세계적 탈냉전 상황에서 유독 한국에서 기승을 부리는 이유를 세 가지로 꼽았다.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을 집단적으로 공유함으로써 ‘반공논리’를 내면화한 탓과, 그 결과물에 다름없는 분단 대치상황, 이를 이용해 재미를 보는 세력의 존재”이다.
색깔시비는 학문적 토론과 지적 대화가 숨쉬어야 할 상아탑에 더 이상 냉전논리, 흑백논리를 강요해선 안 된다는 목소리가 높다.
교수·학술단체들은 "색깔론 논쟁이 정치개혁과 언론개혁의 당위성을 확인시켜줬다”는 뼈있는 말을 했다. “색깔론을 이용해 재미를 보는 세력”이 새겨들을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