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종로구 낙원동 282번지.
대학가에 일명 ‘낙원동 교사’로 회자되는 곳.
지금은 재단법인 건국학원 소유의 임대 건물 3동과 4층 짜리 기계식 주차장이 들어서 있지만 이 곳이 일제 때는 민족교육에 한 몫을 담당했으며, 해방 후에는 건국대와 단국대, 국민대 등 신흥 사립대학 탄생의 산실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더욱이 좌·우 대립이 극심하던 해방 공간에서 오늘날 정치 1번지라는 말이 유래될 만큼 정치 강연과 연설이 잇따랐으며, 교육 이념을 달리하는 미 군정과 설립자들의 이견으로 심지어는 칼부림이 난무하는 갈등 공간이 되기도 했다면 의아하게 생각될지도 모른다.
본지 조사 결과 낙원동 한복판에 연건평 3백여평의 붉은 벽돌 3층 양옥이 들어선 것은 대한제국이 쇠퇴 일로를 걷고 있던 1908년 정치로부터 소외되었던 서북학회에 의해서였다.
사립대학 탄생의 산실이 회관은 특히 1910년 들어 중등 과정의 신식 교육을 담당하는 오성학교가 들어서면서부터 본격적인 교육 시설로 탈바꿈하게 된다. 그런데 오성학교는 교육기관으로서 채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조선 총독부의 무단정치로 곧 폐교의 비운을 맞게 된다.
그러나 이 건물이 교사(校舍)로 사용되는 인연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1918년 당시 천도교 재단이 운영하던 보성전문학교가 이 건물을 4년간 교사로 사용했으며, 그 후 협성학교와 협성실업학교도 당시 재단 이사장으로 재직하던 청년 실업가 박흥식(화신 대표)이 동대문 밖에 넓은 부지를 확보해 이전하기 전까지는 이 곳을 배움터로 이어갔다.
해방 정국에서 낙원동 교사는 민립대학 건설을 추진하던 신익희와 장형, 유석창 등이 모여 설립 의지를 다진 몇 안되는 교육 공간이었다.
건국대의 모체가 된 ‘조선정치학관’이 1946년 5월 개설되고 정동석 등은 이 곳을 빌려 외국어학관을 경영했으며, 한때 신익희를 주축으로 한 국민대학설립기성회 임원들도 이 곳에 모여 현안을 논의했다. 특히 1947년에는 이 교사의 일부를 빌려쓰던 단국대가 문교부 인가를 받아 정규 대학으로 발족함으로써 신흥 사학의 산실이 되었다.
그런데 이들 대학은 인가 과정이나 재단, 교사 문제 등에 있어 서로 다르게 전개되었다.
1945년 10월부터 사설강습소 ‘건국의숙’을 운영하던 유석창은 본격적인 교육 사업에 뛰어들어 1946년 2월 15일 ‘조선정치학관’의 신청을 경기도에 제출하는 한편 5월 15일을 기해 개강하는 등 본격적인 ‘낙원동 교사 시대’를 열었다. 인가가 난 것은 그 해 8월 29일. 그 후 조선정치학관의 명칭은 ‘정치학관’으로 개명되는데 이는 신생 한국의 정치다운 정치를 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
1946년 3월에 발족한 국민대학설립기성회는 상해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범국민적인 민족대학 설립 의지를 표명해 임정의 주 요인을 비롯한 교육계 인사 40여명이 이사진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당시 민족대학 설립을 경계하고 국대안 건립을 구체화하던 미 군정청의 견제에 부딪쳐 난항을 거듭했다. 정규 대학이 아닌 ‘국민대학관’의 이름으로 그것도 그 해 12월에 가서야 인가가 난 것도 이같은 이유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런데 조선정치학관은 아직 완전한 정식 대학은 아니었다. 대학령에 의한 4년제 특종학교로 정규대학 학위를 수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1947년 6월부터 이 교사 일부를 빌려쓰던 단국대가 그 해 11월 문교부로부터 정식 대학 설립인가를 받아 간판을 걸게 되면서 정규, 비정규 대학간 갈등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한 교사에서 간판을 나란히 걸고 수업해도 문제가 없었지만 정규대학으로 학생들이 몰리면서 학생간 대립이 격화돼, 급기야 칼부림이 이어지는 무법천지의 공간이 되기도 했다.
건국대 캠퍼스로 이전 복원 돼두 대학의 싸음은 조선정치학관이 1949년 9월 9일 정치대학으로 설립인가 되고, 단국대학이 그 해 12월 조선전기주식회사(현 한전)가 관사로 사용하던 신당동의 조선전업협화장 건물 7백평을 인수, 이사하면서 막을 내렸다. 낙원동 교사는 그 후 건국대의 야간부 및 법인 사무실로 쓰여지다가 1977년 해체되었으며, 85년 건국대 서울캠퍼스(모진동)에 이전, 복원되었다. 현재 이 건물은 설립자의 교육이념을 기리기 위해 ‘상허기념관’으로 명명돼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1층에는 상허기념전시실과 선사유물전시실, 특별기획전시실이, 2층에는 역사유물이 각각 전시돼 있다.
■ 문교부 대학 설립 기준 확정문교부는 신교육제도 실시 이후 우후죽순처럼 몰려들기 시작한 대학 설립 신청 기준을 정하기 위해 1946년 11월 14일 오후 문교부 회의실에서 고등교육위원회를 개최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고등교육기관 유지단체 표준에 관한 건 △고등교육기관명 제정에 관한 건 △교수자격 표준에 관한 건 △고등교육기관 재학생의 제복 제모에 관한 건 △강사료 통일제정에 관한 건 등을 논의했다.
이같은 논의를 바탕으로 문교부는 대학교수의 등급, 명칭, 경비 등에 관한 기준을 새로 만들고 이때부터 일정한 틀을 가지며 대학을 4개의 명칭으로 분류됐다.
3개 이상의 단과 대학을 종합한 규모의 대학을 ‘종합대학교’, 인문, 혹은 자연과를 한 단위로 한 기관을 ‘대학’, 주야를 불문하고 입학 자격은 고등중학 졸업 정도로서 수업 연한 2개년 이상의 고등교육기관을 대상으로 하되 정규대학으로 인정할 수 없는 기관을 ‘대학관’, 1년 미만의 고등 학술강습을 하는 기관을 ‘학관’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같은 분류 기준은 모든 대학이 설립 취지부터 종합대학으로의 발전을 명시하고 이를 지향하게 되면서 해방 후 고등교육의 양적 확대를 가져오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