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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 법제화 논란 
1945년 12월 5일 열린 조선교육심의회 제2차 전체회의에서 격론을 몰고 왔던 홍익인간의 교육이념 제정 문제는 12월 13일 열린 제3차 회의에서도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이날 반대에 나선 인사는 주로 오천석, 장이도, 이인기 등 당시 미국과 일본에서 공부했던 유학파가 주종을 이루었다. 특히 동경상대를 나온 좌익계 학자로 당시 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백남운은 일제가 주장하던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재판’이라며 극렬 반대했다.

오천석 문교부차장은 당시 상황에 대해 “교육이념을 다루는 분과위원회에서 홍익인간이 채택돼 전체회의에 보고되었을 때, 반대의 이유는 이것이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고기(古記)에서 나온 말이므로 신화에 가까운 비과학적이라는 것과 과거에 일본인들이 즐겨쓰던 팔굉일우라는 말과 비슷한 냄새를 피운다는 것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홍익인간’ 교육 이념화 논란

이같은 논란 끝에 홍익인간을 교육 이념으로 채택한 것은 1945년 12월 20일 오후 2시 미 군정청 회의실에서 열린 조선교육심의회 제4차 전체회의에서였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누가 처음 홍익인간을 교육이념으로 세우자고 주창했는지 아직까지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이는 지금까지 학계에서 홍익인간 시창자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동아일보는 12월 20일자 기사에서 “심의된 교육 이념은 전번의 안재홍 제안을 약간 수정하여 홍익인간의 건국 이상을 바탕으로 한 민주 국가의 공인 양성…”이라 하여 안재홍이 제안한 것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안재홍은 당시 제1분과위원장(교육 이념)으로 대표성을 띠었기 때문에 편의상 그를 지칭한 것일 뿐 처음 그가 주창한 것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 최근 학계의 주류 의견.

연희대 초대 총장을 역임한 백낙준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군정시대에 교육이념 이야기가 처음 나왔습니다. 그 때 위원 중에는 정인보, 현상윤, 하경덕, 안재홍, 나 이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교육이념을 두세 개 제출해 가지고 토론하였는데 처음에는 우리 교육 이념이 될만한 것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어떻게 되어서 내가 생각이 나서 ‘홍익인간’이라고 정하는 것이 어떠냐고 말을 할 때 그 때 모두가 좋다고 하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국회에서 채택

그의 이같은 증언은 훗날 학계에서 홍익인간 시창자가 백낙준이라고 믿는 결정적인 근거 자료로 활용됐다. 그러나 서구 유학파면서 충실한 기독교도였던 백씨의 사상적 배경이나 출신 성향을 놓고 볼 때 철학적 의미까지 내포한 홍익인간 이념을 제창한 것이 가능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 학계의 한 흐름.

조선교육심의회에서 채택된 ‘홍익인간’ 이념은 미 군정이 철수하고 대한민국이 수립된 1948년 이후 교육법 제정기에 또 다시 논란이 재연됐다.

특히 정부로부터 이송된 교육법은 국회 심의과정에서 교육이념이 건국신화와 관련된 공허한 것이라든지 극히 추상성을 가져 과학성이 없다는 비판이 주종을 이루면서 세간에 화제로 떠 올랐다.

제5회 국회 법률안 심의 과정에서 이성학 의원은 “교육이념을 홍익인간으로 한다고 하였는데 그 뜻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히기를 바란다”고 추궁했으며 이에 대해 문교사회분과위원장을 맡은 이영준은 “홍익인간을 교육 이념으로 한 것은 특별한 뜻은 없고 역사성을 포함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특이한 문구를 포함한 것 … ”이라고 답변하기도 했다.

그러나 초대 문교부장관이던 안호상은 “서양의 교육이념은 인간주의·인문주의가 중점적 사상인데 홍익인간은 이보다 훨씬 강도가 높고 포괄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며 “홍익인간이란 말을 제외한 다른 표현은 있을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 홍익인간의 교육 이념 정립을 관철시키는데 앞장섰다.

‘홍익인간’의 법제화 과정은 이처럼 불완전한 논리와 반대 의견 등 우여곡절 끝에 채택되어 해방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 고유의 교육이념으로 정착됐다.


■ 홍익인간 시창자는 누구?

“교육 이념을 홍익인간으로 처음 세운 시창자는 백낙준이 아니라 민족사학자 정인보였습니다. 아니 회의 도중에 우연히 생각이 나서 제창했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정태수 전 대진대 총장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백낙준 박사가 건국 이래 교육이념으로 정착된 ‘홍익인간’ 이념을 처음 제창한 사람이라는 학계의 시각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정씨는 “삼국유사나 제왕운기 등 고문헌에 나오는 ‘홍익인간’이란 용어가 본인 스스로 교육학이나 철학적 이론은 말할 수 없다면서 우연히 생각나 제기했다는 주장은 황당무계하기 그지없다”며 “출전에 대한 이해나 역사인식조차 불완전했던 그가 교육계에서 시창자로 서술되고 있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렇다면 해방 이후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의 교육이념이 된 홍익인간의 처음 주창자는 과연 누구였을까?

이에 대해 정씨는 당시 교육이념을 담당한 제1분과위원회 구성원에 주목하면서 국학자 정인보를 시창자로 내세웠다.

정인보는 한학을 수학하고 중국 망명과 대학의 국학 강사로 출강한 국사학자로 당초 심의회에는 구성원이 아니라 학계 대표로 위촉돼 제1분과 위원으로 배치됐으며, 해방 후 조선 고대사를 주로 연구한 ‘조선사 연구(상)(하)’를 1946∼1947년에 잇따라 출간한 인물로 이 책에는 홍익인간의 어원과 출전, 의미 등을 담은 기록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정씨는 “정인보는 당시 조선교육심의회나 미 군정청 문교부 관리 중 ‘홍익인간’이라는 단어에 대해 출전과 역사적 의미를 학문을 통해 알고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라며 “다만 그가 전면에 나서 직접 주장하지 않고 당시 분과위원장을 맡고 있던 안재홍이나 서구 유학파의 대표격인 백낙준을 통한 것은 분과위원회의 대표성이나 결정사항이 보다 용이하게 이루어질 수 있게 하는 차원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는 교육이념 채택과 관련해 당시 개혁 주도 인사 대부분이 구미 유학파 출신으로 서구식 민주 교육 신봉자들이었던 점, 이들 가운데 오천석 등은 특히 홍익인간의 이념 채택에 대해 비과학적이라거나 비논리적이라는 이유로 반대 입장에 섰던 점 등에서 같은 구미 유학파 출신의 백낙준이 나설 경우 용이할 것이라는 판단이 작용했으리라는 시각과 맥을 같이한다.

고려대 안기성 명예교수는 이에 대해 “당시 학자들 대부분은 한문 서적을 누구나 탐독하는 수준이었으므로 그도 전혀 모르는 일은 아니었을 것”이라며 “다만 심리적으로 사상적 기반이 기독교에 있었다면 자신만의 독자적인 생각으로 교육이념을 내세우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안 교수는 특히 “우리나라 기독교 사상의 근저에는 최근까지도 단군상의 목을 잘라가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형편이니 단군신화에 나오는 홍익인간 이념을 옳게 받아들일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했다. 
입력 : 2004.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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