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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거리로 전락한 한글 간소화 파동 
1953년 10월 9일.

이날 이승만 대통령은 한자를 폐지하고 ‘어렵고 복잡해 배우기 힘든 한글 맞춤법을 대신해 조선조 중엽에서 말기까지 써 오던 옛날 맞춤법을 쓰도록 하라’는 훈시를 내렸다.

그러나 당시 김법린 문교부장관은 학자들에게 자문한 결과, 비과학적인 이 훈시의 실천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하고 1954년 4월 장관직을 전격 사임했다.

한글 소리나는 대로 써라

한글 간소화 파동의 근원은 그러나 1950년 5월 3일 이승만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자청해 한글전용과 철자법에 관한 의견을 피력하면서 이미 시작됐다.

“… 국문철자법에서는 상당부분에서 무리가 적지 않다. 예를 들어 받침에 있어 ‘ㅅ’을 둘씩이나 쓰는 것은 아무 소용없는 받침을 하고 있으니, 이것은 고쳐야 할 것이다. … 한인들이 완고해서 퇴보하려면 모르되 그렇지 않으면 내가 말하는 식으로 고쳐야 할 것이나, 만일 민간에서 고집을 하고 개량을 안하면 정부만이라도 사용하도록 할 것이다.”

이 대통령이 이날 표현한 ‘내가 말하는 식’은 우리 글을 소리나는 대로 쉽게 표기하라는 평소 주장을 되풀이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대통령은 틈 나는대로 한글 표기를 바꿀 것을 종용했으며 특히 1953년 3월 27일 담화에서는 “한글 철자는 이전 신구약과 기타 국문서에 쓰던 방식을 따라 석달 안에 교정해서 써야 한다”고 발표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구한말에 쓰던 한글 철자법이 제대로 된 연구 검토없이 사용돼 불완전하다는 지적이 높았던 데다가 한 나라의 문자를 상용화하려면 적어도 1~2년은 족히 걸리는 사안을 3개월 안에 완수하라고 지시한 데서 온 충격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한글간소화안 관철을 장담하며 등장한 이선근 문교부장관은 문교부 관리와 대학에 있는 학자들을 총동원해 1954년 6월말 ‘한글간소화 안’을 만들고 7월 2일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7월 3일 전격적으로 공포했다.

그 내용은 ㄱ, ㄴ, ㄷ, ㄹ, ㅁ, ㅂ, ㅇ, ㄺ, ㄻ, ㄼ 등 11 받침만 쓰던 1921년의 언문철자법과 같은 것으로 조선조 중엽의 언문 습관으로 돌아가라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이었다.

연희대 국문학회도 문제 제기

이 조치로 이른바 한글파동 논란은 한글학회는 물론, 학계와 언론계, 문화계, 국회 등지로 퍼져나가면서 거센 논란과 저항을 받게 됐으며, 심지어 외국 학계의 언어학자들 간에도 웃음거리가 되기에 이르렀다.

한글학회는 1954년 7월 7일 문교부의 ‘한글 간소화안’에 대한 반대 성명을 통해 “시대를 역행하는 불합리·부조리한 맞춤법은 문자의 시각적 심리를 무시하고 이해의 이성적 과정을 몰각해 도저히 문명 국민에 맞는 글 노릇을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특히 다음날인 7월 8일에는 대학 최초로 연희대 국문학회가 최현배와 김윤경 교수를 연사로, 정부안의 문제점을 분석하는 강연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당시 국회 문교분과에 소속된 의원들도 참석해 강의를 경청했다.

최현배는 이날 강연에서 “우리는 극비리에 구성되었다는 한글 간이화 입안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그 솜씨의 결과로 미루어서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너무도 말과 글에 대한 현대적·과학적 소양이 없고 다만 권력 만능의 맹신을 가지고 학문의 전당을 마구 파괴한 만용에 도취된 상태…”라고 통박했다.

국회에서도 7월 10일 이선근 문교부장관을 출석시킨 가운데 제20차 본회의를 열어 “전문학자의 주장을 억누르고 온 국민의 여론을 무시해 가면서 민족문화에 위협을 주는 행정조치를 철회하라”고 공박했다. 조병옥 의원은 특히 “세계적으로 훌륭하다고 인정받고 있는 한글을 간소화한다는 것은 독선적 처사이며 교육법을 위반한 것”이라고 추궁하기도 했다.

이에 앞서 미국 예일대학의 조교수 사무엘 E. 마틴박사는 1954년 7월 2일 이선근 문교부장관에게 보낸 공개 편지에서 “소위 한글 간소화안을 읽고 나서 느낀 바 두려움은, 만일 이 안이 제정 시행될 때에는 한국은 ‘말씨의 전진 대신에 후퇴를 불러오는 맞춤법 개혁의 단 하나인 나라로서, 세계 교육계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한글간소화안에 대한 각계의 반대가 거세지면서 정부와 자유당은 그 후 문교부의 한글 간소화 안을 일단 보류했다가 다음해인 1955년 9월 19일 이승만 대통령이 한글 간소화안 방침 철회를 담은 담화문을 발표, 그간의 해프닝을 없던 것으로 돌려놓았다.

■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

“내가 귀국한 이후로 이것을 고치려고 여러번 담화를 발표하였으나, 지금와서 보니 국문을 어렵게 복잡하게 쓰는 것이 벌써 습관이 되어서 고치기가 대단히 어려운 모양이며, 또한 여러 사람들이 이것을 그냥 쓰고 있는 것을 보면 무슨 좋은 점도 있기에 그럴 것이므로, 지금 여러 가지 바쁜 때에 이것을 가지고 이 이상 문제삼지 않겠고, 민중들이 원하는 대로 하도록 자유에 붙이고자 하는 바이다. …. 우리나라 사람들의 총명이 특수한만치 폐단이 되거나 불편한 장애를 주게 될 때에는 다 깨닫고 다시 교정할 줄 믿는 바이므로 내 자신 여기 대해서는 다시 이론을 붙이지 않을 것이다.”

한글 간소화 파동의 중심에 있던 이 대통령은 1955년 9월 19일 담화를 통해 그간의 한글 파동에 이처럼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한글 간소화 파동은 그릇된 인식을 가진 통치자에 의해 강요되었던 수치스러운 문화정책(어문정책)의 종말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위정자들에게 또 다른 교훈을 던져주는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입력 : 2004.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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