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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은 대학생활] 등사한 책으로 공부한 어려웠던 시절 
내가 서울공대에 입학한 것은 1957년으로 휴전이 된 지 불과 4년 후였다. 당시 모집정원은 3백75명이었고 전국에 공대가 몇 개 안되었다. 서울에는 한양공대, 연세대, 인천에 인하공대, 충남대, 부산대, 전남대, 전북대, 동아대, 조선대 그리고 대구에 청구대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서울공대는 경기도 양주군 공덕리에 있었고 나는 신촌역에서 기차통학을 했는데 기차로 1시간정도 걸렸다.

당시 중랑교에서 서울공대까지는 허허벌판이었고 건물이라고는 한독약품회사가 있었을 뿐이었다. 버스는 중랑교까지만 가고 거기서는 한 시간에 한 대 정도가 공대까지 다녔다.

공대생 전체가 1천5백명이었고 5시만 되면 모두 퇴근을 해서 학교는 텅 비었다. 제대로 된 기숙사는 없었고 임시기숙사에 적은 인원이 살고 있었다. 학과는 10개가 있었고 전임교수는 70명정도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박사학위를 가진 교수는 열 명도 안되었다.

일제때 전문학교를 나와서 중학교 교사를 하시던 분들이 해방후에 대학교수가 된 분이 많았다. 따라서 연구를 제대로 해본 경험이 없는 분이 대부분이었다.

더구나 서울공대는 외딴곳에 떨어져 있었으므로 수학이나 물리학은 강사들에게서 배우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당시 미네소타계획에 의해서 미네소타대학을 1학기나 1년쯤 다녀온 교수님들이 새로운 학문을 가르침으로써 학생들은 자극을 받았고 기초실험실은 비교적 잘 갖추고 있었다.

3학년때 조교 한 사람이 미국유학을 떠났는데 3학년 전기과 학생 대부분이 김포공항에 환송나간 일이 있었다.

1학년 수학책은 토머스의 미적분과 해석기하학 원서를 해적판으로 찍어서 배웠는데 아직까지도 그 책은 여러 대학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전공 과목에는 인쇄된 교과서가 전무했고 손으로 써서 등사한 책으로 공부했다. 전기공학과에서 단체로 서점에 선금을 내고 원서를 몇권 주문했는데 6개월이 지나도 책이 도착되지 않아서 환불소동을 벌린 일도 있었다.

당시 원서 한권은 6~8달러 정도였는데 한 달 하숙비가 10달러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따라서 당시에 학생들이 원서를 사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등록금은 1학기에 8만환(지금돈으로 8천원)이었다. 그런데 1959년쯤에 파란색 표지를 한 대만 해적판 원서가 수입되기 시작하였고 그때 산 책 한 권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요사이 학생들은 3만∼4만원만 주면 원서 교과서를 살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런데 당시 한국에는 충주비료공장이 유일한 첨단공장이었고 전국의 발전용량도 25만 ㎾정도밖에 안되었다. 그나마 전기회사는 조선전업(발전·송전), 경성전기와 남선전기가 배전을 담당하고 있었다. 금속공업, 전자공업, 기계공업, 석유공업도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공대를 졸업해도 별로 갈 곳이 없었다. 전자과를 나오면 방송국, 전기과를 나오면 발전소에 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지금 학생들은 상상도 못할 만큼 한국은 가난했고 공업 수준은 후진국이었다.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아마도 70불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래도 우리들은 미래 공업한국의 역군이 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공부를 했다. 토목이나 건축과는 그래도 좀 나은 편이었다. 4학년때 4·19혁명이 일어났다. 그러나 서울공대는 워낙 외딴 곳에 있었으므로 데모한번 못해 보았다.

그리고 4학년때 전기과에는 처음으로 아날로그 컴퓨터 한 대가 도입되어 우리들이 그 앞에서 사진도 찍고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내가 3학년때까지 전교생의 성적표를 모두 게시판에 붙이곤 해서 다른 학생들의 성적까지도 볼 수 있었다.

당시 재학중에 입대를 하면 1년정도 복무하고 제대를 할 수 있었으나 나는 졸업을 한 후 군복무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4학년말에 공군 장교시험에 합격을 하고 3월 졸업후 6월 1일 입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5·16군사혁명이 일어났던 것이다. 예정대로 입대하고 4개월 훈련후 1961년 10월 1일에 공군소위로 임관되었다. 입대 당시에는 3년 복무였는데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소급법을 통과시켜서 복무연한이 4년으로 연장되었다. 그래서 1965년 9월 30일에 제대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제대할 당시 월 봉급은 5천원 정도로 쌀 한 가마니 값에 해당되었다. 3학년 2학기에 독지가의 장학금을 받게 되어 4학년때에는 가정교사도 안하고 편하게 공부만 할 수 있었다.

이제 동기생들은 대부분 은퇴를 한 나이가 되었다. 대학4년은 인생에서 참으로 중요한 시기며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 시기를 유용하게 보내지 못하면 인생이 달라진다. 우리 세대의 학생시절에 비하면 지금 학생들은 너무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장수영 포항공대 교수 | 입력 : 2004.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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