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월 19일 자유당의 독재와 국민 탄압에 저항하는 학생들의 목메인 절규가 이 땅을 흔들었다. 해방과 6·25를 겪으며 국가의 주체성과 민주주의 사회에 대한 열망은 더욱 커져가는데도 집권여당인 자유당의 횡포는 날로 심각해지던 어느 날 더 이상 참을 수 없음에 분연히 일어난 학생들의 민주화 투쟁의 역사가 마침내 시작된 것이다.
고려대 4·18 학생시위3·15 부정선거로 이승만과 이기붕이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당선되자 야당인 민주당 의원들의 부정 불법 선거에 대한 규탄이 이뤄졌고 마산을 시작으로 학생들이 선두에 나서며 시위가 시작됐다. 당황한 자유당 정권은 학생과 시민들에게 발포를 지시, 사상자가 발생했고 데모 군중을 공산당으로 몰아갔다.
그러는 가운데 역사를 바꾸어 놓을 비극이 발생한다. 마산 앞바다에 마산상고생 김주열 군의 시체가 떠올랐고 국민들은 분노했다. 대대적인 시위는 결국 이를 계기로 전국으로 퍼져 나가게 된다.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은 상과대 학생회장이었던 이기택(민주당 전 상임고문)과 정경대 학생회장 이세기(한나라당 전 국회의원) 등을 주축으로 인촌 김성수 동상 앞에 집결했다. 그리고 데모에 앞서 ‘고려대학교 4·18선언문’이 한 학생에 의해 연단에서 낭독되었다.
교표가 박인 흰 수건을 머리에 맨 고려대 학생들은 기성세대의 자성을 촉구하며 정부에 마산사건의 책임을 추궁하는 시위를 펼치기 시작했다. 경찰의 곤봉세례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사당까지 데모대가 나아갔으나 당시 유진오 총장을 비롯해 같은 학교 출신 정치가인 민주당 이철승 의원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다시 학교를 향해 질서정연한 행진을 하게 된다.
데모대가 청계천 6가쯤에 도달할 무렵 난데없이 40여명의 깡패들이 학생들을 향해 쇠뭉치 등의 무기를 마구잡이로 휘둘러댔다. 이정재와 임화수, 류지광 등 이른바 자유당이 비호하는 정치 깡패들이었다. 피로 물든 몸을 감싸쥐며 쓰러지는 학생들의 모습은 처참했다. 이들의 테러로 국민들은 더욱 분노할 수밖에 없었고 감출 수 없는 울분은 그 다음날인 4월 19일 서울의 모든 대학생들을 총궐기하게 했다.
■ 고려대학교 4·18 선언문친애하는 고대 학생제군!
한마디로 대학은 반항과 자유의 표상이다. 이제 질식할 듯한 기성 독재의 최후적 발악은 바야흐로 전체 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위협하고 있다. 그러기에 역사의 생생한 증언자적 사명을 띤 우리들 청년학도는 이 이상 역류하는 피의 분노를 억제할 수 없다.
만약 이와 같은 극단의 악덕과 패륜을 포용하고 있는 이 탁류의 역사를 정화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후세에 영원한 저주를 면치 못하리라. 말할 나위도 없이 학생이 상아탑에 안주치 못하고 대 사회 투쟁에 참여해야만 하는 오늘의 20대는 확실히 불행한 세대이다. 그러나 동족의 피를 뽑고 있는 이 악랄한 현실을 방관하랴.
존경하는 고대 학생 동지 제군! 우리 고대는 과거 일제하에서는 항일투쟁의 총본산이었으며 해방 후에는 인간의 자유와 존경을 사수하기 위하여 멸공전선의 전위 대열에 섰으나, 오늘은 진정한 민주이념의 쟁취를 위한 반항의 봉화를 높이 들어야 하겠다.
고대 학생동지 제군!
우리는 청년학도만이 진정한 민주역사 창조의 역군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여 총궐기하자.
4·25 대학교수단 시위
서울대와 연세대, 전날 시위를 주도했던 고려대를 비롯해 성균관대와 동국대, 중앙대, 건국대, 국민대, 경기대 등 국회의사당으로 집결한 이들 대학의 학생들은 경무대로, 법원으로, 그리고 국회의장 이기붕의 집으로 나뉘어져 시위를 감행했다. 경무대 앞에서 경호관 곽영주의 지시로 발포가 이뤄졌고 학생들이 쓰러졌다는 소식은 더욱 이들 학생들과 군중을 격분시켰다. 곧 계엄령이 내려졌고 이승만의 사임을 촉구하며 장면 부통령이 전격 사퇴하게 된다.
25일 교수단의 데모가 일어나자 다시금 시민들이 자유당의 부정부패와 폭력에 대응해 궐기하기 시작했다. 권오돈 연세대 교수, 변희용 성균관대 교수 등 각 대학 2백58명의 교수들이 이승만의 독재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서울시내를 행진하게 된다. 교수들은 4·19 학생의거에 대한 합법성을 알리고 자유당 정권을 규탄하는 성명서와 시국선언문을 채택, 발표한다. 교수들의 데모에 힘을 얻은 중·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이 다시 거리로 쏟아져나왔고 군인도 출동했다. 하지만 군인들은 경찰과 달리 발포하지 않았다.
대학교수단의 데모가 있었던 다음날 26일 이승만은 부정선거를 인정하고 하야를 선언한다.
사실 4·25 대학교수단 시위에 대해서는 이견들이 많았다. 1971년 ‘신동아’가 마련한 한 좌담회에서는 비상계엄령 하에서 교수들의 회의가 버젓이 이뤄졌다는 점과 시위 행진에 교수들이 아닌 외신기자들이 선두에 섰다는 점을 들어 모종의 연결이 있었으며 주체적이지 못했다는 등의 발언이 한동안 논란거리가 되었던 것. 그리고 2백여명의 숨져간 제자들이 이뤄낸 혁명의 공을 교수들이 반쯤은 가로챈 것이 아니냐는 시인 김재원의 글이 1963년 7월호 ‘세대’지에 실리기도 했다.
■ 대학교수단 시국선언문이번 4·19 의거는 이 나라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계기이다. 이에 대한 철저한 광정(匡正)이 없이는 이 민족의 불행은 운명을 도저히 만회할 길이 없다. 이 비상시국에 대비하여 전국 대학교수들이 양심에 호소하여 아래와 같이 우리의 소신을 선언한다.
1. 마산·서울 기타 각지의 데모는 주권을 빼앗긴 울분을 대신하여 궐기한 학생들의 순진한 정의감의 발로이며,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민족정기의 표현이다.
2. 이 데모를 공산당의 조종이나 야당의 사주로 보는 것은 고의의 왜곡이며 학생 정의감의 모독이다.
3.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데모에 총탄 폭력을 기탄없이 가함은 민주와 자유를 기본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경찰이 아니라, 불법과 폭력으로 권력을 유지하려는 일부 정부 집단의 사병(私兵)이다.
4. 누적된 부패와 부정과 횡포로써 이 민족의 대 참극과 치욕을 초래한 대통령을 위시하여 여·야 국회의원 및 대법관들은 그 책임을 지고 물러서지 않으면 국민과 학생들의 분노는 가라앉기 힘들 것이다.
5. 3·15 선거는 부정선거이다. 공명선거에 의하여 정·부통령 선거를 다시 실시하라.
6. 3·15 부정선거를 조작한 주모자들을 중형에 처하여야 한다.
7. 학생 살상의 만행을 위하여 명령한 자 및 직접 하수한 자는 즉시 체포해 처형하라.
8. 모든 구금된 학생은 무조건 석방하라. 설령 구금한 학생중에 파괴와 폭행의 범행이 있었더라도 동료의 피살에 흥분한 비정상 상태의 행동이고 파괴와 폭동이 본의 아닌 까닭이다.
9. 공적 지위를 이용하여 부정축재한 이는 군관민(軍官民)을 막론하고 가차없이 적발 처단하여 국가의 기강을 세우고 부패와 부정을 방지하라.
10. 경찰의 중립화를 확고히 하고 학원의 자유를 절대 보장하라.
11. 학원의 정치도구화를 폐기하라.
12.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사이비 학자와 정치도구화된 소위 문화예술인을 배격한다.
13. 학생 제군은 38선 이북에서 호시탐탐, 공산도배들이 제군들의 의거를 100% 선전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경계하라. 또한 38선 이남에서는 반공의 명의를 남용하는 방식으로 제군들이 흘린 피의 정치 도구화를 조심하라.
14. 시국의 중대성을 인식하고 학생들은 흥분을 전정하여 이성을 지켜서 속히 학업의 본연으로 돌아오라.
단기 4293년(1960) 4월 25일
대학교수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