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을 담당하는 문교부가 대학과 격돌해 시비가 붙었다.
박정희 정권이 대학의 자율성과 자주성에 대해 고민할 이유가 없었던 것은 오히려 대학의 감독 강화를 통한 통제력 확보가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정권의 정통성 부재가 항상 정권 내부 불안의 근본 원인이었고 가장 큰 약점이었던 군사정권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정원초과 모집자 합격 취소하라이화여대는 1964년 2월 23일 당시 김옥길 총장과 각 단과대학장 및 처장의 책임하에 7백34명의 학생을 추가 합격시키기로 결정을 내린다. 문교부와 군부는 대학 정비와 학사자격 국가고시, 대입자격 국가고시 등으로 대학과 학생을 긴축해 나가는 교육정책을 펼쳐온 게 사실이었고 대학들로 하여금 정원 이상을 추가로 선발하지 말 것을 당부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대학 정비를 거치면서 대학들은 경영난으로 온전한 운영이 어려웠다. 대학의 운영을 정상화하기 위한 수업료 인상이 이미 당국의 승인을 받은 상태였음에도 박정희 대통령의 돌연 불가 선언으로 이마저 어렵게 되자 추가 선발은 사학들에게 불가피한 결정이었다. 대부분의 사학들이 정원외 30%를 더 선발했다.
본보기라는 차원에서 이화여대는 문교부의 강력한 응징 대상으로 선택됐다.
문교부는 즉각 합격취소를 지시하는 한편, 이화여대 이사회에 김옥길 총장의 해임을 요청하고 불응하면 총장 승인을 취소하는 동시에 가정대 등 인가를 취소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화여대는 문교부의 반 협박에 이사회를 열어 초과 모집 학생들을 살린다는 조건으로 김옥길 총장의 사표를 수리했다.
그러나 문교부는 끝까지 입학 취소를 고집했다. 결국 초과 모집 학생을 구제하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혔고 문교부는 3월 11일 가정대 인가 취소 등 66학년도부터 시행하게 될 3개 조치를 발표해 사건을 일단락 지었다.
한편, 이즈음 서울 시내 사립대 총장과 학장들은 모임을 갖고 대학정원제의 철폐와 사립학교법 폐기 그리고 장학제도의 자율적 운영 등을 결의하게 된다.
한편 숙명여대에 난데없이 문교당국이 “분규를 수습하지 못하면 현 이사진을 해체시키고 관선이사를 선임하겠다”는 계고장을 발부, 전달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65년 2월 20일의 일이었다. 66년 1월 5일 숙명재단 이사들이 문교부 계고장 내용의 부당성에 대해 항의하면서부터 숙명재단과 문교부간 반목과 대립이 시작된다.
설립자에게 돌려줘라몇몇 사학들이 내부적으로 말썽을 일으켜 이사진이 수차례 바뀌었던 게 사실이고 여기에 숙명여대도 포함되었던 전과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63년 여름에 취임한 당시 이사진과 새 총장에 의해 분규는 이미 사라진 상태였고 정상적인 재단 운영이 이뤄지고 있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느닷없는 문교부의 관권 개입은 속사정이 따로 있었던 것. 63년 11월에 귀국한 구(舊)황실의 이 은(李垠)과 그의 아들 이 구(李玖)가 64년 2월 21일 국회에 청원서를 제출하고 숙명학원을 설립자인 자신들에게 넘겨달라고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설립자의 부재로 숙명여대에 분규가 일었던 것이고 현 재단 관리자들도 분규의 와중에 있으므로 전원 해임하고 설립자에게 운영권을 돌려줘야한다는 것이 그들 요구의 이유였다. 구 한말에 엄비(妃)가 상당한 토지를 일본인에게 주고 숙명학원의 전신인 명신여학교를 세운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60년이 지난 후 설립자를 자칭하는 것도 이견이 있을 수 있는데다 설립자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는 사립학교법의 기본 이념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더구나 이 은은 건강이 쇠약해져 있었고 이 구는 한국어도 모르고 국적조차 불분명한, 실질적으로 한국에 있어 문외한이었다.
지나친 사학운영 간섭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회 문교공보위원회는 64년 3월 2일 이 요구를 수락하도록 정부에 건의하게 된다. 당시 고광만 문교부장관은 현 이사진의 해임에 대한 법적 이유가 없고 국내 사정에 어두운 이씨 측의 학교에 대한 직접 관여가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며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숙명여대는 문교부가 재단을 이 은에게 넘기기 위해 행정권을 발효, 관선이사를 임명하고 이들로 하여금 윤태림 총장을 해임 결의하게 되자 교수들과 학생 심지어 동창들까지 관선이사들의 퇴진과 부당한 처사의 시정을 정부에 강력하게 요구하기에 이른다.
법정으로까지 비화된 이 사건에서 “이사승인 취소승인 취소”라는 법원 결정으로 사태는 반전된다. 하지만 사법권을 무시하고 문교부가 다시 관선이사를 세워 맞서고 관선이사는 사표를 제출하는 등 지나치게 사학의 운영에 개입하자 문교당국에 대한 비난이 더욱 거세게 일었다.
66년 3월 10일 최초의 학원자유화 운동이 벌어지는데 숙명여대 학생 3천명이 ‘관선이사 배격’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내에서 시위를 펼친 것이 그것이다. 이 여파는 5월 20일 광주 중·고등학생 2천명의 학생대회와 6월 13일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의 학원자유화 성토대회로 이어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