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공화정인가 군정인가, 대학 휴학령 발동
박정희 군부는 1967년 6월 15일 전국 28개 대학과 57개 고등학교에 휴학령을 내렸다. 휴학령 발동의 와중에도 6월 30일 서울대 학생회장단과 투쟁위원회는 6·8 총선 무효화 투쟁 선언문을 발표하고 고려대 학생 1천5백여명은 광화문 국회의사당 앞까지 진출해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백여명의 학생들이 체포, 연행됐다.
불법총선 규탄 시위, 휴학령으로 대응
학생들의 이같은 박정희 정권의 부정선거에 대한 항거 시위는 69년 6월 서울대와 고려대, 연세대 그리고 경기대, 경북대 등 전국 20여개 대학에서 불붙은 3선 개헌 반대, 반 독재투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쿠데타를 이끌었던 박정희 소장은 1963년 2월 18일 원대 복귀를 하고 민정 이양을 하겠노라고 선언한다. 이른바 여론 무마용 발언이었다. 그 해 9월 공화당 대표로 지명된 박정희는 제5대 대통령 후보로 나선다. 10월 15일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야당인 민정당 후보 윤보선을 10만표 차이로 누르고 대통령으로 당선됐고 11월 26일 제6대 국회의원 선거가 공화당의 압승으로 끝나면서 군정 요원의 대부분이 공화당 소속으로 민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부정부패와 불법 행위로 물든 박정희 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제6대 대통령 선거와 제7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야당 계열이 합당을 결의해 67년 2월 7일 대통령 후보에 윤보선과 당수에 유진오를 추대, 신민당을 창당한다. 그러나 67년 5월 3일의 대통령 선거에서도 그리고 6월 8일의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신민당은 참패한다.
6·8 선거가 3·15 선거와 다름없는 부정선거라고 규정, 대학가에서는 이를 규탄하고 나섰다.
67년 6월 9일 연세대 학생 2백여명이 총선 규탄 성토대회를 열었고 12일 서울대 법대생과 경북대 학생들이 부정선거에 대한 규탄대회를 가졌다. 13일에는 서울대와 고려대 등 서울 시내 7개 대학의 학생들이 데모에 나서 경찰과 대치했으며 전국 대학과 고등학교로까지 시위는 확산되기에 이른다.
민주화 열망에 큰 상처
이 시기를 과연 공화국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공화정이라는 것이 성립과정이나 절차 그리고 통치권의 행사에 있어 민주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 하지만 군대가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민정 이양이라는 타이틀을 걸었지만 결국 쿠데타의 주동자인 박정희가 군복을 벗고 민간인이라는 신분으로 대통령이 됐다는 점에서 제3공화국은 공화국이라는 말을 붙이기가 상당히 껄끄럽다. 물론 유신정권의 제4공화국, 전두환의 제5공화국 그리고 노태우의 제6공화국 역시 민주적 정권 창출과 통치권 행사라는 공화정의 정통성과는 거리가 멀다.
신민당은 의원 등록을 거부하고 총선 무효화 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강경한 입장을 밝혔지만 군정하의 정치와 사회는 민주주의와는 무관했고 강압적 권력과 통제만이 존재했다.
1961년 4·19 혁명이 학생들의 고귀한 희생으로 인해 이 땅에 민주화의 불씨를 당겼다면 5·16 군사쿠데타는 이같은 정치적 민주화의 사회적 열망에 상처를 입히고 말았다.
입력 : 2004.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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