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3월 24일 대규모적인 최초의 한일회담 반대 학생시위가 거세게 일어났다. 오후 1시 반경 서울대 문리대 학생 3백여명은 일본 수상 이케다와 이완용 상을 만들어 제국주의자와 민족 반역자 모의 화형식을 치렀다. 이완용 상은 김종필을 대신한 것이었다. 한일국교 정상화를 반대하는 학생들의 의지를 보인, 일종의 김종필에 대한 선전포고인 셈이었다. 결의문을 채택한 이들 서울대생들의 뒤를 이어 고려대 학생 1천여명이 ‘주체성을 잃은 굴욕적 대일외교 반대선언문’을 채택했고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해 시위를 계속했다.
이와같은 거센 반발은 5·16 군부가 국가경제 재건을 목표로 일본 자본 도입을 위해 한일회담을 적극 추진하면서 야기됐다. 일본에 파견된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은 일본 외상 오하라와의 비밀회담을 통해 청구권 문제를 타협지음으로써 63년 말 국교정상화가 눈앞으로 다가오게 됐기 때문이다.
같은 날 연세대 학생들도 함석헌과 장준하의 대일 외교 반대 강연을 들은 후 가두데모에 나서 고려대생들과 합류했다. 이 하루동안 시위에 가담한 학생들은 자그마치 5천여명으로 4·19혁명이후 최대 규모였다. 이날 시위로 1백50여명의 학생들이 연행됐고 34명이 구속됐으며 40여명은 중경상을 입었다.
3·24 데모와 정부의 강경대응
25일 서울대 5백여명, 연세대 3천5백여명, 한양대 4천여명 등 서울 시내 8개 대학 1만8천5백여명의 대학생들이 배명고 등 3개 고교의 학생 2천여명과 함께 대대적인 시위를 감행한다. 부산에서 3천여명, 대구에서 1천5백여명 등 7개 지방대 학생들의 시위도 이어졌다.
한편 중앙청에서 서울 시내 37개 대학 학생 대표 98명과 문교부장관 등 정부 관계자가 자리를 함께 했지만 협의는 불가능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문교부장관인 고광만은 황국신민화를 가르치던 친일교사였고 따라서 그는 학생들에게 아무런 설득력도 가질 수 없었던 것.
26일 한일회담에 대한 정부 방침이 공표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2만5천여명의 학생들이 시위에 나선다. 나흘째로 접어든 시위대의 기세는 그칠 줄 몰랐다. 거리에는 1만여명의 학생이 쏟아져 나왔고 지방에서 시위에 나선 학생들은 4만3천여명에 달했다. 28일 오후 서울대와 고려대, 연세대 학생회는 정부의 태도를 주시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시위를 일단 중단하게 된다.
이때 서울대 김중태와 현승일 등 3·24 데모를 이끌었던 학생들에게 불온 문서가 든 소포가 전달됐고 국회에서는 ‘청사회’를 통한 박정희 정권의 학원 사찰문제가 정치 쟁점이 되고 있었다. 4월 17일 서울대 문리대 학생 1백50여명은 한일회담 중지와 학원사찰 중지 그리고 구속학생 석방 등을 요구하며 가두 시위를 벌였다. 20일에는 4·19 혁명 4주년 기념식을 올린 직후 박정희 정부를 매국정부라 일컬으며 거리 시위를 단행했다. 성균관대 학생 3백여명도 가두시위에 돌입했으나 경찰에 의해 저지당한다.
21일에도 동국대와 성균관대, 서울대 학생들의 데모로 80여명이 다치고 1백30여명이 연행됐다. 데모양상이 폭력화되어 가자 박정희 정부도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박정희는 물러나라, ‘대 정부 통고문’
국교 이전에 차관 선행의 징조가 보이자 5월 18일부터 시위가 다시 시작됐다. 20일 일어난 5월 데모는 전국 50여개교 2만5천여명의 학생들이 참여했다. 1천여명의 학생들이 연행됐고 즉결재판에 회부된 학생이 1백여명 그리고 긴급 구속된 학생이 또한 1백여명이었다. 서울대 문리대생들은 이날 특별히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치르고 동국대와 성균관대 그리고 건국대 학생들과 합류해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으며 그 과정에서 경찰과 대치로 유혈극이 벌어졌다.
수도경비사령부 산하 공수부대 황길수 대위의 휘하에 있는 군인들이 중무장을 하고 새벽에 당직판사를 찾아가 데모 학생들의 구속영장에 서명을 강요한 사건도 이 때 발생했다. 청사회 회원 송철원 납치사건에 즈음해 경찰들이 수업중인 서울대 미대 교실에 뛰어들어 학생을 끌어내고 이를 말리던 교수를 끌어가는 일도 일어났다.
5월 25일부터는 이전에 시위에 참가하지 않았던 학생들까지도 데모대열에 뛰어들었다. 서울은 물론 부산과 대구 등 지방에서도 대학생들은 구국 비상결의를 선언하고 박정희 정권의 부정부패와 학원사찰 그리고 한일굴욕회담을 공격했다.
27일 전남대 학생들이 박정권 하야를 요구하는 데모를 감행했고 같은 날 오후 5·16 이후 최초로 서울대 교수 5백여명이 긴급 총회를 통해 시국수습 결의문을 채택한다.
29일 서울시내 28개 대학 대표들이 서울대 법대에서 ‘난국타개 학생 궐기대회’ 제3차 준비회의를 열고 25일의 구국 비상 결의선언에서 내세운 요구조건이 30일 밤 12시까지 관철되지 않을 때에는 실력 행사에 들어가겠다는 ‘대 정부 통고문’을 작성하게 된다.
계엄령과 휴교사태
정부는 대책 논의에 부심했다. 대학가의 거센 반발을 예상했지만 이 정도까지 심각해질 줄은 몰랐던 것.
게다가 30일부터는 서울대생들을 필두로 학생들이 단식 농성에 들어갔고 6월 3일에는 마침내 실력 행사를 선언하게 된다. 서울시내 18개 대학 1만5천여명의 학생들은 경찰, 군 병력과 대치했다. 군부대의 출동은 결국 계엄령을 선포하는 시발점이 됐다.
계엄령이 선포된 다음날인 6월 4일 일제히 휴교령이 내려졌고 7월 29일 계엄령이 해제되기까지 55일간 구속된 학생들은 1백68명, 민간인은 1백73명 그리고 언론인은 7명으로 총 3백48명에 달한다고 군부는 밝혔다.
3·24 이후 데모 주동학생은 학칙을 고쳐서라도 퇴학과 무기정학을 시켜 보고하도록 대학에 지시했고 비협조적인 교수는 징계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6·3 데모의 파급 효과는 만만치 않았다. 한일회담을 중단시켰을 뿐만 아니라 국민들에게 군사독재 정권에 대해 항거하는 젊은이들의 뜨거운 열의를 보여 주었고 4·19 이래 반외세 통일논리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전면에 등장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
한편, 김영삼 정부시기에 바로 이 6·3 데모의 주인공들인 이른바 ‘6·3세력’이 정치권에서 급부상하게 된다.
입력 : 2004.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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