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대학생활] 황량한 캠퍼스에서 독재권력에 저항
나는 60년대 중후반 대학을 다녔으니 그로부터 어언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당시는 ‘보리 고개’ 란 말이 실감 날 정도로 우리의 대학생활도 무척 힘들고 황량했다. 5·16후 군사쿠데타 정부의 ‘구국의 결단’이라는 요란한 선전과 ‘조국 근대화’ 슬로건은 곳곳에서 펄럭거렸지만 우리들 학생들은 희망을 걸 수 없었다.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도탄에 빠진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겠다”는 5·16혁명 공약은 “나라의 발전이 나의 발전의 근원임을 자각해야 한다”는 국민 교육 헌장으로 이어져 곳곳에서 권위주의 독재 정치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당시 학원가의 정치적 이슈는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 투쟁이었으며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는 전면 휴교 조치와 무시무시한 계엄 선포로 이어져 학생들의 산발적인 저항은 속수 무책이었다. 군부 쿠데타세력을 등에 업은 박정희 공화당 정권은 중앙정보부 조직을 통해 반정부 학생세력을 조직적으로 매수하거나 탄압하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정부의 서슬퍼런 학원 탄압에도 불구하고 3선 개헌 전야에는 캠퍼스 곳곳에서 삼삼오오로 모여 시국을 걱정하는 우국지사(?)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으니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신성한 우리들의 상아탑은 학원 안정이라는 명분으로 공공연히 정보 형사들의 출근처가 되었으며, 이에 뒤질세라 4·19 정신을 계승하려는 열혈 청년들의 민주화 투쟁의지는 곳곳에서 준비되고 있었다.
나는 바로 이러한 시기에 대학에 입학하여 취직을 위한 공부냐? 민주화를 위한 학생 운동이냐는 두 가지 선택 앞에 어느 것도 확신이 서지 않아 한동안 방황하고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학생들처럼 이 집 저 집 가정교사로 연명하던 나도 결국 시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방관자일 수는 없었고 결국 적극 가담자가 되었다. 나는 대학 2학년 어느 봄날 당시 선배들의 권유에 의해 우리 대학 학생 운동의 보루로 정평이 나 있던 진보적인 학내 이념 서클(요즈음말로 동아리)에 엄격한 심사(?)를 거쳐 가입하였다. 이 서클은 우리들의 조직상의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여학생의 가입까지 금지하였는데 지금 생각하니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당시로서는 구하기 힘든 소위 ‘불온서적’을 탐독하고 막걸리 한사발 앞에서 밤을 새워가며 시국을 걱정하고 토론한 날이 부지기수였다. 나라의 민주화와 분단된 조국의 통일 문제로 가슴앓이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우리들 앞에 밀어닥친 취직이나 출세를 위한 공부는 ‘부르주아적 이기주의’로 치부하였으며, 일부 선배들은 미제국주의 언어(?)인 영어 공부까지 배척하는 우를 범하기도 하였다. 당시 우리 회원들은 동지애로 굳게 뭉쳐 회식이 끝날 때는 반드시 청년 학도의 기백을 ‘학도가’로 대신하고, 당시 학원가에 유행했던 ‘선구자’를 부르면서 우리의 결의를 다짐하였다. 우리는 당시 정권의 횡포에 대항하여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선봉이고 투사임을 자임하기도 하였다. 우리는 5·16 후 군사 정권에 의해 금지되었던 4·19 기념식을 최초로 거행하고, 공화당 정권의 3선 개헌 반대와 후일 민청 학년 사건의 주역이 되기 위한 준비를 일찍부터 한 셈이다. 당시 4·19 8주년 기념사를 하던 나는 학교 행정 당국으로 부터 제지를 받았고, 식장에 참석한 학생들의 거센 항의로 기념 단상은 아수라장이 되면서 시가지 행진으로 이어졌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 있다. 당일 기념식장 학생들의 대열 속에서 학교 당국의 처사에 거칠게 항의하던 어느 선배의 우렁찬 육성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 선배는 그후 시국 사건에 연루되어 희생되고 말았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이러한 60년대 시대를 앞서가는 여러 대학의 이념적인 서클활동이 집약되어 민주화의 조직적인 역량으로 승화되어 오늘의 문민, 국민, 참여 정부의 길을 열었다고 확신한다. 나는 3선 개헌 반대에 이어 70년대 초반 유신 철폐를 기치로 내건 ‘민청 학련 사건’을 나의 학창 시절에 결성된 우리 대학 서클이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을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민주화의 길고도 험헌 여정에서 이런 저런 시국 사건에 연루되어 우리 대학 선후배 수십 명이 투옥되고 단위 대학 서클로서는 가장 희생이 컸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아프다. 60년대 말 졸업과 동시에 군에 입대하여 그 어려운 시기를 동참하지 못하고 학문을 한답시고 현실에 안주해 버린 나는 지금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희생된 선배와 후배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대학에 남아 있던 나는 신군부 등장 이후 이런 저런 이유로 교단에서 쫓겨날 뻔하였지만 묘하게도 살아남아 제적된 후배들을 보살펴 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나는 80년대 민주항쟁의 공간에서 ‘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 회원’으로서 신 군부 정권의 종식을 염원하였고, 지금도 대학 교수회를 통한 대학 자치와 민주화과정에 동참하고 있는 것을 작은 위안으로 삼고 있다.
배한동 경북대 교수 |
입력 : 2004.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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