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유신’과 ‘긴급조치’ 시대의 대학, 대학인
1969년 ‘3선개헌’에 성공한 박정희 정권은 70년 들어 안팎으로 심각한 도전에 직면한다. 닉슨 독트린으로 인해 냉전체제의 와해 움직임이 일기 시작한 가운데 71년에 불어 닥친 유류 파동은 수출 주도형 경제구조에 큰 타격을 주었다. 특히 경제개발 과정에서 소외된 노동자, 도시 빈민 등 기층 대중의 저항에 부닥쳤다. 국내외 상황을 돌파하고 장기집권의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박 정권은 72년 이른바 ‘유신체제’를 출범, 독재권력체제를 갖춘다.
졸업정원제·예비고사 실시
정부 주도 하에 이루어진 70년대 주요 고등교육 정책은 실험대학 운영과 지방대학 육성, 입시제도 개선, 졸업정원제 실시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졸업학점 감축과 계열별 모집, 부전공제 채택 등을 골자로 한 실험대학은 73년 10개 대학에서 출발해 80학년도에 43개 대학으로 확대된다.
75년부터 대학의 ‘능력별 졸업제도’가 시행되고, 입시제도 개선을 위해 74년부터 대입예비고사와 본고사가 병행된다.
대학간 인수·합병 등 부침도 심해 관선이사 체제로 운영되던 우석대는 71년 고려대로 병합되었고, 서라벌예대는 재정난으로 72년 중앙대에 인수되었다. 77년 삼성그룹은 재단 분규를 이유로 성균관대 운영권을 문교부에 반납했고, 대한항공은 78년 한국항공대를 인수했다. 대학 재정난으로 인해 등록금은 매년 두자리씩 인상되었고 대학 정원도 확대되었다.
유신헌법 선포와 간첩단 사건
70년대는 무엇보다도 대학인들의 반독재 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된 시기였다.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반대하는 학생과 지식인들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당국은 71년 신학기부터 ‘대학교련’을 필수과목으로 지정, 4년간 7학점을 이수토록 한다. ‘대학 병영화’를 강요한 이 조치는 대학가의 교련 철폐 투쟁을 유발해 전국적으로 격렬한 시위가 벌어진다. 당국은 10월15일 위수령을 발동, 10개 대학에 무장군인을 진주시키고 대학에 휴업을 강요한다.
72년 10월 국회를 해산한 박정희가 ‘유신헌법’을 선포하자, 대학가에서는 헌법복귀 운동이 전개된다. 이에 정부는 74년 1월8일 ‘긴급조치 1호’를 선포, 유신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하거나 이를 타인에게 알리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고 이를 어길 경우 비상군법회의에 회부토록 했다. 75년 4월까지 무려 아홉 차례나 발동된 긴급조치는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모든 행위를 금지시키며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학생과 민주인사를 탄압하는 도구로 활용된다.
‘반공’이 국시(國是)였던 70년대. 유신정권은 반독재 투쟁을 ‘북한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매도하며 연일 간첩단 사건을 터뜨리는데, 그 진원지는 대학가였다.
73년 유럽거점 대규모 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조사를 받던 서울대 최종길 교수는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과 ‘제2차 인민혁명당’ 사건, 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 사건 등 정부는 ‘공산정권을 수립하려 했다’는 빨간 딱지를 붙여 피고인에게 사형 또는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독재에의 항거와 그 종말
긴급조치 9호 선포이후 75년 7월에는 사회안전법·민방위법·교육공무원법 개정안 등이 국회에 통과돼 대학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교수들의 자주화 선언과 체제 비판 목소리가 제기되자 교육공무원법을 개정해 ‘교수재임용제도’를 처음으로 실시했으며, 학도호국단을 부활시켜 학생회를 폐지시켰다.
특히 학생운동이 사회 변혁 세대로 자리하자 정부는 학원사찰을 강화해 학생들의 신상과 동태를 파악하는 상담지도관을 학내에 설치하도록 했다. ‘학생분담 지도교수제’ 실시로 학생 지도가 교수의 중요 책무로 부각되면서 교수와 학생들 사이의 불신이 심화되었고, 79년 9월에는 학생의 의사와 관계없이 총장의 직권으로 휴학을 명할 수 있는 이른바 ‘지도휴학제’가 실시되었다.
하지만 권력의 탄압이 아무리 거세도 민주화를 염원하는 민족·민주·민중운동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70년대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었던 시인 김지하는 ‘시’를 무기로 박정희와의 기나긴 싸움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으며, 전태일은 ‘노동자도 인간이다’는 절규를 남긴채 분신, 노동자·농민 등 민중운동이 전개되는 전기를 마련한다.
74년부터 79년까지 학원사태 등과 관련, 대학에서 제적된 학생은 전국 40개교에 7백86명에 달했다.
79년 10월 ‘부마항쟁’을 군대의 힘으로 진압한 박정희 정권은 권력내부의 분열이 심화돼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의해 그 막을 내리게 된다.
입력 : 2004.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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