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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전태일 
‘고도 성장’과 ‘근대화’의 단꿈에 젖어있던 1970년대, 젊은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은 노동운동의 불꽃을 점화하며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잿빛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었던 1970년 11월13일 오후 1시30분경. 서울 평화시장 앞 길거리에서 22살의 재단사 전태일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자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대접하라”고 절규하며 분신 자살한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며 ‘근로기준법 화형식’과 함께 자신의 몸을 불살랐던 전태일은 어머니(이소선)에게 자신이 못다 이룬 일을 꼭 이뤄 달라고 당부하며 “배가 고프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숨을 거뒀다.

전태일의 분신자살

“전태일의 죽음을 사람들은 ‘인간선언’이라고 부른다. 먼지구덩이 속에서 햇빛 한번 못보고 하루 열여섯 시간을 노동해야 하는 어린 여공들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가 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그는 죽었다.”(고 조영래 변호사)

‘수출 1백억달러 달성’이란 화려한 구호를 내걸고 고속성장을 구가하던 70년대에는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노동자가 늘어났다. 정부는 경제개발이란 구호아래 노동 3권을 제한했으며,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살인적인 근로 조건을 강요받았다.

64년 미싱사로 평화시장에 첫발을 들여 놓은 전태일은 우연히 ‘근로자의 기본적 생활을 보장·향상시킴을 목적으로 한다’는 ‘근로기준법’을 발견하고 69년 ‘바보회’를 조직한다.

어린 소녀들이 폐병으로 쓰러지며 하루 14시간 이상을 일하고도 받는 일당이 고작 70~80원(당시 다방의 커피 한잔 50원)인 평화시장의 열악한 노동 실태를 개선하기 위해 몸부림치던 전태일은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산화했다.

사흘뒤인 11월16일 서울대 법대 학생 1백여명이 가칭 ‘민권수호 학생연맹 준비위원회’를 발족, 전태일의 장례식을 학생장으로 거행하겠다고 밝힌 것을 시발로 11월20일에는 서울대와 연세대, 고려대생 등이 항의집회를 가졌다. 서울대의 휴교령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시위와 농성은 거세졌고, 여기에 종교계까지 합류, 정치·사회 문제로 비화된다.

전태일의 죽음은 당시 지식인과 대학생들에게 노동자와 농민문제에 대한 뼈아픈 자각과 함께 기층민중과의 ‘연대’를 조직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노동운동에의 자각

그동안 민족·민주화 운동에 주력했던 학생운동은 민중운동에 눈을 돌리게 됐으며, 노동 현장에 뛰어드는 풍토가 나타나기 시작됐다.

전태일 투쟁은 노동계에도 번져 ‘민주노조’ 결성 움직임이 전개된다. 어머니 이소선은 아들의 뜻을 이어 평화시장에 ‘청계 피복노조’를 세우고 이후 동일방직·YH 무역 등에서 민주노조가 속속 결성된다. 70년대에는 약 2천5백개의 노동조합이 새로 생겨났고 조직 노동자 수도 70년 47만명에서 75년 75만명으로 늘어났다.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6년여동안 피신 생활을 하며 3년에 걸쳐 ‘전태일 평전’을 집필, 그의 삶을 부활시킨 고 조영래 변호사는 이에 대해 “전태일이라는 한 인간의 육성이, 그 처절한 사랑과 분노와 항의로 불타는 육탄이 우리 사회에 던진 충격의 결과였다”고 말했다.

“친구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내 생애 못 다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 데, 굴리는 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전태일의 유서 중에서> 
입력 : 2004.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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