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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군인 고려대 난입사건 
1971년 10월5일 새벽 1시30분경. 30여명의 무장군인이 고려대 학내에 난입, 교련반대 철야농성 중인 학생들을 구타하고 5명을 중구 필동의 수도경비사령부로 연행했다. 불법연행된 학생들은 고려대 이념서클인 ‘한맥회’ 간부들로 전날 고려대 정문 기둥에 ‘부정부패의 원흉 이후락(당시 중앙정보부장)·윤필용(수도경비사령관)·박종규(대통령경호실장)를 처단하라’는 대자보를 붙인 장본인들.

당시 국방부장관은 “현역 교관의 화형식을 갖는 등 교련을 맡고 있는 장교를 모욕했기 때문에 장병들이 격분, 학생들을 연행한 것”이라며 “6시에 학생들을 고대 총장 자택에 인계했다”고 말했다.

격렬한 교련 반대시위

당시 대학가에서는 교련 철폐 운동이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71년 2월23일 국무회의에서 대학교련을 필수로 한 ‘교육법시행령개정안’을 의결, 3월부터 실시키로 결정하자 격렬한 교련 반대 시위가 일어난 것. 학원 병영화를 위해 교련을 4년간 7백11시간(7학점)을 이수토록 한 법 시행령을 밀어붙인 것으로 이에 학생은 연일 교련반대 성토대회로 화답했고, 시위로 인한 처벌과 휴업령이 잇따라 내려졌다.

이런 와중에 발생한 군인들의 고려대 난입사건은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 고려대 김상협 총장은 “정복 군인 학원 난입사건은 국법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학원의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라며 이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취해줄 것을 요구하는 항의 공문을 정부 당국에 보냈다.

고려대생 1천여명은 진상 조사와 관련자 처단, 공개 사과를 요구하며 수업을 전면 거부, 연일 성토대회를 가졌으며, 서울대, 연세대, 전남대 등에서 학원 난입과 부정부패를 규탄하는 시위가 확산되었다.

학원시위가 전국으로 번지자 정부는 10월15일 서울시 일원에 ‘위수령’을 선포한다. 위수령은 육군부대가 한 지역에 주둔해 그곳의 경비와 질서, 시설물 보호 등을 책임지도록 한 것으로 70년 4월 대통령령으로 제정됐다.

서울시 일원 ‘위수령’ 선포

15일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10개 대학에 무장군인이 진주, 첫날 1천8백89명의 학생을 연행했으며, 10개 대학에 휴업령이 내려졌다. 학원에 진입한 군인들은 학생들을 무차별로 구타 연행했다. 이날 전국 대학에서 시위 주동학생으로 지목된 1백56명이 제적되고, 서클 74개가 해체되었으며, 교련을 거부한 학생 4천여명에게 징집 경고가 내려졌다.

휴업령으로 대학 문이 닫힌 가운데 문교부는 전국 대학에 제적학생의 전·편입학을 금지하고 총·학장의 학생 처벌권과 학생생활 감독권을 강화하는 학칙을 개정할 것을 지시한다.

학생들의 면학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함이라는 것이 문교부의 설명이었지만 학생들의 현실 참여를 봉쇄하기 위한 변칙적인 학칙 개정이었다. 교육대학을 제외한 전국 84개 대학이 문교부 지시대로 학칙을 개정했다.

휴업령은 11월9일 해제되었다. 위수령 발동의 진원지였던 고려대가 휴업 28일 만인 11월11일 개강하던 날, 고려대 교정에서는 4천여명의 학생과 2백여 교직원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한 제전을 가졌다.

고대신문에 따르면 이날 김상협 총장은 담화를 통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재출발, 재출항을 다짐하는 자리에서는 그 전도의 순항을 천지신명께 빌기 위해 반드시 일정한 제물, 일정한 희생을 바치기로 되어있다”며 “필요하다면 기꺼이 그 제물 그 희생의 역할을 맡겠다”는 비장한 결심을 표명했다. 
입력 : 2004.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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