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공’이 국시(國是)였던 1970년대. 유신정권은 반공·반북 이데올로기를 이용해 반독재 투쟁을 ‘북한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매도했고, 긴급조치 위반과 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 혐의로 시위 주동자를 검거했다.
반독재 투쟁의 근원지였던 대학가는 간첩 소탕작전의 진원지로 지목돼 학생과 교수, 지식인 등이 도피생활을 하다 붙잡혀 갔다. 빨간 딱지를 붙인 채 비상군법회의에 회부된 이들은 ‘북한의 뜻에 동조하거나 북한을 이롭게 했다’는 명목으로 오랜 복역생활을 견뎌내야만 했다.
서슬퍼런 국가보안법
1971년 11월13일 중앙정보부는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을 발표한다. ‘서울대생 4명과 사법연수원생 1명이 모의해 대한민국을 전복하려 했다’는 것. 고작 5명이 ‘학생 시위를 일으키고 사제 폭탄을 이용해 중앙청을 습격 장악한 뒤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는 것이 발표 요지였다. 교련 철폐 투쟁이 유신철폐 투쟁으로 확대된 71년. 당국은 위수령 발표를 정당화하고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기 위해 학생들을 제물로 삼은 것이었다.
72년 ‘유신헌법’ 선포이후 헌법 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대학가에 확산되자, 당국은 74년 1월8일 긴급조치 1호를 선포, 유신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하거나 이를 타인에게 알리는 행위를 금지, 이를 어길 경우 비상군법회의에 회부한다고 발표한다.
74년 2월5일. 서울지검은 이철호(소설가)·김우종(경희대 교수) 등 문인·지식인 간첩단을 적발했다고 발표한다.
당국은 74년 4월3일 유신철폐와 민주화 등을 요구하는 대학생들을 이른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검거한다.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 학생 시위에 제동을 걸기 위해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된다.
중앙정보부는 4월25일 ‘민청학련은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혁당 재건위조직과 재일조총련계 및 일본공산당, 국내좌파 혁신계가 정부를 전복하고 4단계 혁명을 통해 이른바 노동자·농민에 의한 정부를 세울 것을 목표로 과도적 통치기구로서 민족지도부 결성을 획책했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으로 학생을 포함해 1천24명이 조사받고 이중 2백53명을 비상군법회의에 구속 또는 불구속 송치했다. 비상군법회의 검찰부는 이중 1백80명을 기소했고, 인혁당 관계자 8명은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서울대생 유인태·이철 등 민청학련 관계자 6명에 대해서도 사형이 선고되었다. 75년 4월9일, 우리 사법사상 가장 치욕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인혁당계 8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된 것이다.
긴급조치의 족쇄
75년 7월9일 사회안전법안, 교육관계법개정안 등 4대 전시입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며 그해 11월22일 “모국유학을 가장해 일본에서 잠입한 학원침투 북괴간첩단 21명을 검거했다”고 당국은 발표한다.
유신말기인 79년 박 정권은 10월4일 ‘반독재·반제국주의’ 지하투쟁단체였던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에 대한 검거 작전을 실시, 84명을 검거한다. 남민전 사건은 하부조직인 ‘민주구국학생연맹(민학련)’이 신민당사에서 농성중이던 YH 여성노동자에 대한 가혹한 진압 과정을 알리기 위해 유인물 배포 활동을 벌인 것이 당국의 수사 대상이 된 것. 당국은 남민전을 ‘적화통일을 기도해온 자생적 공산혁명 세력’이라고 발표했다.
한편 문교부에 따르면 학원사태 등과 관련해 74년이후 제적된 학생은 전국 40개교에 7백86명에 달한다. 연도별로 보면 74년 1백25명, 75년 3백49명, 76년 12명, 77년 96명, 78년 1백57명, 79년 46명이 제적되었다.
이들은 긴급조치 위반과 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 학사징계자 등을 포함한 수치로 대학별로는 서울대(2백96명), 성균관대(1백38명), 고려대(82명), 연세대(54명), 경희대(28명), 서강대(27명) 순이었다.
입력 : 2004.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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