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체제가 수립된 다음해인 1973년 10월18일 중앙정보부(이하 중정)에서 유럽거점 대규모 간첩단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조사를 받던 서울대 최종길 교수(법대)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그가 간첩단사건 연루자인 이재원과 중학동기이며 유럽 유학시기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16일 오후1시께 남산 중앙정보부 조사실에 끌려간 이후 삼일만의 일이었다.
의문의 죽음
10월25일 중정 수사단은 “최종길은 간첩임을 자백, 여죄를 조사받던 중 7층 화장실 창문에서 투신 자살했다”고 발표, 이 사건을 자살 사고로 결론 내렸다. 또 “최종길은 고정간첩으로서 자신의 가족과 국내 조직망을 보호할 목적으로 투신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견해를 덧붙였다.
하지만 이 결과 발표를 신뢰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가 자살한 동기도 석연치 않았고, 정황 증거도 앞뒤가 맞지 않았다. 최 교수는 간첩혐의를 시인하는 자필 기록 하나 남기지 않았고, 당시 중정 요원이던 그의 동생 최종선이 투신 현장을 찾아 나름의 조사를 벌였으나 핏자국도, 물로 씻은 흔적도 찾지 못했다는 점도 의구심을 키웠다. 그러기에 최 교수의 죽음을 둘러싸고 중정의 고문·조작·은폐와 강압 수사에 대한 의혹은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특히 73년 10월 당시 시국은 서울대 문리대에서 시작된 반유신 투쟁이 법대를 비롯, 전 대학가로 번져 나가던 상황이었다. 이때 최 교수는 시국 사건에 연루된 학생들의 보호막이 돼준 몇 안 되는 교수로 당국의 눈총을 받아왔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다.
1988년 결국 검찰은 유족 등이 낸 최종길 교수 의문사 진정 사건에 대해 조사를 벌였다. 그러나 그 결과도 사건의 실체에 전혀 다가가지 못했다. 검찰은 ‘자살의 증거도 타살의 증거도 없다. 간첩임을 입증할 증거도 간첩이 아님을 입증할 증거도 찾지 못했다’며 진상 규명 불능 상황으로 결론 내렸다.
검찰의 조사 발표후 진실은 묻히는 듯했다. 그러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최 교수 사망사건 조사에 착수하면서 실타래는 풀리기 시작했다.
국가공권력에 의한 희생
진상규명위는 지난 2002년 5월14일 최 교수는 민주화운동과 관련해 국가공권력에 의해 희생됐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날 발표에서 진상규명위는 “당시 중정의 장아무개 수사단장으로부터 ‘최 교수가 타살됐다는 판단을 했지만, 당시 중정 분위기가 자살로 몰아가 사인에 대한 추가조사 등 더 이상의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는 진술을 받아냈다”고 밝혔다.
특히 장 단장은 “시신 상태로 보아 걸어다니기 힘들 정도의 심한 고문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며 “최 교수가 화장실 변기 위로 올라가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 자살했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얘기”라고 말하는 등 최 교수의 타살 가능성을 강력하게 주장했다고 진상규명위는 설명했다. 또 중정 수뇌부가 조직적으로 타살 은폐에 개입했음을 뒷받침하는 진술도 확보했다. 또 당시 최 교수를 조사했던 대부분의 중정 수사관들도 “최 교수가 간첩임을 자백하지 않았고, 자살하지도 않았다”고 진술한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최 교수 의문사 사건을 비롯해 과거 군사독재 시절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이들의 억울함은 온전히 가시지 않을 것 같다. 형사소송법상 의문사 사건에 대한 공소 시효가 지났기 때문이다. 정치적 격변기에 독재권력이 남긴 불행한 기억은 대학사회도 무심히 지나치지 않았고 살아남은 이들이 풀어야 할 숙제를 여전히 남겨놓은 것이다.
입력 : 2004.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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