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 이후 폐기됐던 이승만 시기 어용 학생모임의 대명사인 학도호국단이 1975년 6월7일 ‘학도호국단 설치령’이 다시 공포됨으로써 15년만에 부활했다. 1975년 4월 베트남의 공산화, 그리고 이로 인한 북한의 남침 가능성 증대가 그 계기였다.
베트남 공산화가 계기
설치령 공포 직전 당시 문교부장관이던 류기춘은 학도호국단 설치의 이유에 대해 “베트남의 적화로 인해 북한의 남침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는 만큼 총력 안보체제의 확립과 비상시에 대비한 학생조직화의 필요성 증대라는 절실한 시대적 요청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다.
박 정권은 학도호국단 조직과 교련교육을 통해 평상시에는 교련, 전시에는 후방 질서 유지와 지역방위 등을 실시토록 훈련함으로써 학원을 병영화시켰다. 학도호국단은 학생들의 대표 역할을 하며 여러 행사를 주도했다. 조직은 총무부·훈련부·새마을부 등 6부로 구성됐고, 면학 캠페인을 실시하거나, 봉사대를 모집해 교육·위생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다. 특히 호국단에 대한 자체 검열도 실시됐는데 무척이나 까다로웠다고 한다.
검열이 시작되면 4학년을 제외한 학생들과 교직원들은 복장을 갖추고 사열과 구급법 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좀 더 내용을 들여다보면 당시 학도호국단이 박정희 통치와 유신체제에 대한 확고한 충성심을 심어주는 데 주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학도호국단을 직접 겪었다는 문화평론가 이영미 씨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학도호국단 간부들은 일주일씩 경주 화랑수련원에서 보냈는데 일정에는 매일 한두 시간씩 박정희 대통령의 어록을 들으며 명상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 정신교육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 일주일 후 퇴교할 때에는 정말로 애국심에 불타올라 태극기를 보며 애국가 부르면서 감격에 겨워 엉엉 울면서 나오게 만들었다.”
학도호국단을 통해 ‘국가 안보’보다는 ‘정권 안보’를 이루려 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대학생 통제 장치
유신체제 유지를 위한 대학생 통제 장치라는 분위기를 서서히 느끼게 된 학생과 지식인들은 자연히 학도호국단의 조직과 운영 방법 등에 대한 여러 문제점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편제가 군대식으로 되어 있는데다 간부들이 임명제여서 경직되고 억압적인 분위기라는 점, 운영 방법이 상부의 지시에 따라 피동적으로 이루어져 대학의 자율과 창조적 정신을 훼손한다는 게 비판의 초점이었다. 특히 자기들의 대표를 자기 손으로 뽑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학생들의 자괴감을 불러일으켰다. 학생활동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라면서 폐지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차츰 높아졌다.
결국 학도호국단은 79년 10·26사태와 함께 학생 자치활동과 학생 참여도 신장을 강화하는 유화적 개선 방안을 거쳐 5공화국에 들어와서 폐지된 후 학생회로 부활했다. 하지만 병영화된 대학과 그로 인한 군사주의적 사고·행동 방식의 집단적 체험은 대학인의 가슴 속에 깊이 각인되어 상당기간 아카데미즘을 질식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입력 : 2004.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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