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대학은 학생들이 민주화 투쟁과 급격한 학사 정책의 변화로 몸살을 앓던 시기였다.
80년 들어 정부는 사학 운영쇄신의 기본지침을 발표하여 사학 재단과 학교 경영을 완전히 분리하고 대학 휴교령을 해제했다. 또 민심수습책으로 7·30 교육개혁 조치를 통한 일련의 대학 정책이 시행돼, 과외수업 금지, 전일제 수업, 대학 본고사 철폐를 전제로 하는 대학입시 제도의 개혁과 졸업정원제 실시, 정원의 130% 입학, 한국방송통신 대학의 4년제 승격 등을 추진하게 된다.
대학정원의 급속한 증가
특히 졸업정원제는 대학의 문호를 크게 개방했는데 이로인해 81학년도의 대학 정원은 전문대학을 포함해 80학년도에 비해 약 10만여명이 증가했다. 이러한 현상은 대학교육의 대중화를 가속화하고 대학의 재무구조를 개선하는데는 도움이 되었지만 교수대 학생 비율 악화, 교육 시설 부족, 졸업정원 이외의 학생들을 억지로 탈락시키기 위한 상대평가제 등 부작용이 많아 88년도에 폐지되었다.
다음해 정부는 사립학교법 시행령을 개정해 개방대학 설립을 결정했고, 같은해 7월에는 사학법인 정관 규칙을 마련하고 해외유학 자격을 대폭 완화했다. 사립학교법 개정으로 대학 설립자와 그의 직계 존비속은 총장이 될 수 없게 되었고, 총장임명권, 재정운영권, 교수임용권 등 주요 권한이 분권화되어 교수회 등에 넘기게 됨으로써 설립자의 권한은 크게 제약을 받게 되었다.
한편 전국 대학 총·학장들의 모임인 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가 82년 결성되어 대학교육 발전을 위한 다양한 사업들을 실시했고, 84년 마침내 대학생 수가 1백만명을 돌파, 대학의 대중화 시대를 맞이했다. 또 정국이 유화국면에 들어서게 되면서 학원도 활기를 되찾기 시작해, 해방 직후부터 84년까지 정부에 의해 인위적으로 구성되었던 학도호국단이 해체되고 진정한 의미의 학생 자치기구인 총학생회가 발족해 학생들의 학원자율화 요구와 민주화요구 투쟁이 들불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학원자율화 요구 점증
70년대 통기타 문화나 장발이 유행했듯이 80년대에도 학생들의 문화는 존재했지만, 학내에 전투경찰과 사복경찰이 상주하는 군부독재의 쇠사슬이 곳곳에 매복된 대학에서 여가를 향유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부는 각 대학에 쌍쌍파티나 축제를 통해 이들의 머리를 마비시키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학생들의 반항은 깊어만 갔다.
당시 학생들의 문화는 ‘막집’문화라 할 수 있다. 검소한 생활을 했고 당구나 프로야구는 스스로 잊어버렸다. 몇몇은 고무신을 신고 다녔고, 막걸리에 김치 안주로 밤을 새우는 학생들이었다. 80년대 불려진 수많은 저항가요도 이런 학생문화와 관련을 맺고 있다.
80년대 대학가의 정치개혁 투쟁은 안개정국에서 출발했다. 70년대의 유신시절 ‘자유’라는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불온’으로 몰려 구속되는 지독한 통제 아래서 벗어난 대학가는 80년 봄 개학이 되자 민주화 열기에 들뜨기 시작했다. 그해 4월 서울소재 14개 종합대 교수 3백61명은 학원사태에 관한 성명서를 발표하고, 이해 7월에는 서명교수 87명이 해직을 당한다. 그러나 ‘비상계엄 철폐하라’, ‘정부개헌 중지하라’를 외치는 시위와 집회는 연일 계속되었고 5월17일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기 전까지 학생들과 교수들의 민주화 요구는 식을 줄 몰랐다.
그러나 5월17일 비상계엄령은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국회와 대학 등에 군 병력이 진입했다. 모든 정치활동이 중지되었고, 학생 시위 배후 조종자로 재야인사, 복학생, 학생대표가 검거됐다. 5월18에는 광주 민주화 운동이 발생하여 많은 학생, 시민이 희생되었고 5월31일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설치됐으며 12월20일 강제로 언론 통폐합이 단행되기도 했다.
6월 민주항쟁의 승리
이어 85년 미 문화원 점거농성과 하반기부터의 대통령 직선제를 위한 개헌운동이 대중투쟁으로 확산되면서 대학의 학생운동도 이론화와 조직화의 길을 걷게 됐다. 이때 ‘헌법제정 민주의회 소집’을 개헌투쟁의 기본 노선으로 설정한 민민투(반제 반파쇼 민족민주 투쟁위원회)와 ‘반전 반핵 반미’를 내건 자민투(반미 자주화 반파쇼 민주화 투쟁위원회)의 두 개 학생운동 주체를 만들게 되었다.
80년대는 가히 ‘논쟁의 시대’였다고 일컬어질 만하다. 사회구성체 논쟁과 변혁론 논쟁은 단지 ‘운동권’만의 논쟁이 아니라 한국 지성계에 뚜렷한 각인을 남긴 역사적 논쟁으로 볼 수 있다. 혁명, 계급, 민중, 반제 등의 담론이 새롭게 등장했으며, 특히 민족민주운동세력의 실천적 문제 의식과 결합되어 사회의 근본적 총체적 변혁을 지향하는 ‘변혁운동’의 이론적 밑받침이 되어주기도 했다.
이밖에 87년 발생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은폐 조작을 계기로 시작된 6월 민주항쟁은 6·29선언을 이끌어내 5공정권을 무너뜨리는 결정적 동기가 되었으며,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창립 및 시국선언과 7년 만에 부활된 ‘교수협의회’가 교수의 권익 옹호와 대학 자율화를 당면 과제로 활동을 시작하기도 했다.
입력 : 2004.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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