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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회군’과 빼앗긴 ‘서울의 봄’ 
80년 4월9일 성균관대 학생들의 병영집체훈련 거부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학생들은 교련교육의 일환으로 열흘간 군 부대에 입소해 훈련을 받도록 돼 있었는데, 학생들이 이 군사 훈련을 정면 거부한 것이었다. 이후 훈련폐지를 요구하는 농성과 시위가 다음 입소 차례였던 서울대와 서강대를 비롯, 여러 대학으로 확산되었고 이러한 학원민주화투쟁은 점차 계엄 해제와 유신잔당의 퇴진을 겨냥한 대대적인 정치 투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병영 집체훈련 거부 사건

각 대학의 병영집체훈련 거부 투쟁이 본격화되고 이 문제가 전국적인 쟁점으로 떠오르자 신군부는 신문, 방송을 통해 ‘학생들의 안보의식 결여’를 비난하고 교내 시위·농성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게 했다.

5월 2일, 서울대는 개교 이래 최대 인원인 1만명 이상의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비상 학생총회를 열었다. 학생들은 이날 병영 집체훈련 거부투쟁 철회를 결정하고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 퇴진’, ‘정부개헌 중단’과 ‘노동 3권 보장’ 등 본격적인 정치 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계기로 학생운동은 학내민주화운동에서 벗어나 전국적인 정치 투쟁으로 돌입했다.

이어 5월14일 고려대에 모인 서울지역 27개 대학의 총학생회 대표 40명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와 ‘전두환, 신현확 등 유신잔당 퇴진요구’ 등을 결의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정세에 대한 공동 대처 방안을 마련했고 전면적인 가두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한다.

당시 문교부 장관이었던 김옥길은 기자회견을 통해 학생들의 자제를 당부했지만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의 거센 물결을 막을 수는 없었다.

5월 14일 정오를 전후하여 서울시내 대학생 7만여명이 일시에 교문을 박차고 나왔다. “비상계엄 해제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유신잔당 타도하자” “언론자유 보장하라” “정부개헌 중단하라” “노동3권 보장하라”등을 외치며 학생시위대는 영등포, 청량리 등을 거쳐 광화문으로 수만명이 진출하였다.

비상계엄령 해제 요구

15일 오후, 서울역 앞엔 서울시내 30개 대학의 학생 10만명이 운집해 ‘계엄철폐’를 외치면서 민주화 일정을 제시할 것을 요구했다. 신군부의 진압군도 시내 도처에 진주했는데, 이같은 대결 상황은 대구와 광주, 부산, 인천, 목포, 청주, 춘천, 천안 등 지방의 대학에서도 벌어졌다.

이날 신민당은 국회의원 이기택을 비롯한 66명의 명의로 비상계엄 해제건의안을 국회에 제출했으며, 5월 15일에 발표된 지식인 1백34인의 시국선언문도 다음과 같이 비상계엄 해제를 요구했다. “오늘의 난국은 19년간 독재정권의 반민중적인 경제시책과 철권정치의 소산이다. …… 비상계엄령은 즉각 해제되어야 한다. ……최규하 과도정권은 평화적 정권이양의 시기를 금년 안으로 단축시키는 것은 물론 그 일정을 구체적으로 밝힐 것을 요구한다.”

서울역 광장에 운집한 학생들은 신군부와 최규하 정권에 대한 대규모 성토대회를 열었고, 임시 연단으로 설치한 버스 지붕 위에 올라선 연사들이 ‘서울역을 사수하자’고 외치자 시위대는 박수로 호응하기도 했다.

이어 총학생회장단은 사후대책 논의에 들어갔는데, 오후8시 30분경 시위를 해산하고 철야농성을 위해 교내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시민들의 호응이 없는 상황에서 밤에 군인들과 충돌하는 것이 현명하지 못하다는 판단에서였다.

후일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심재철 씨는 그때의 상황을 “5월 15일 서울역 시위는 신군부의 여론 조작으로 시민들의 호응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우리는 퇴각을 결정했지만 그것은 결정적 과오였습니다. 그같은 결정적 오류가 광주에서의 대학살로 이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라고 1988년 11월30일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 증언을 통해 말했다.

8시 50분부터 시위대는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으며, 9시40분경 해산에 반대하던 고려대 학생 2천여명이 시청 앞까지 행진한 뒤 후에 ‘서울역 회군’사건으로 명명된 서울역 앞 시위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80년 학생들의 이같은 가두시위는 민주진영의 모든 세력들을 신군부와 최규하 정부의 유신 부활음모 분쇄를 위한 공세에 나서도록 고무하고 촉진시킨 활동으로 평가받았지만 결국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실시발표와 모든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졌고, 이 조치를 계기로 ‘서울의 봄’ 학생운동은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무산되고 말았다. 
입력 : 2004.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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