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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성조기, 반미·통일 운동 확산 
1980년대 들어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미국의 재평가 작업이 이뤄지면서 대학가에서는 반미운동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5공 출범 이후 82년에도 학원 소요가 끊이지 않은 한 해였다. 이 해 학원사태 중 특기할 만한 사건은 부산 미 문화원 방화사건이다. 3월 18일 부산시 중구 미 문화원 건물에서 갑자기 불이나 도서관 열람실에서 독서하던 대학생 1명이 숨지고 3명이 부상당하는 방화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은 사건발생 14일 만에 고신대 문부식 군 등 15명을 검거했다.

부산 미 문화원 방화사건

이들은 방화사건 당시 “미국 문화의 상징인 부산 미 문화원을 불태움으로써 반미투쟁의 횃불을 들어, 부산 시민에게 민족적 자각을 호소한다”는 성명서를 살포했다.

대학가의 반미운동은 80년대 중반 들어 조직적으로 나타난다. 85년 5월 23일 서울대·연세대·고려대·성균관대·서강대 등 5개 대학생 73명이 서울 미 문화원 2층 도서실을 점거, 철야농성을 벌였다. 이들은 ‘광주사태 책임지고 미국은 공개 사과하라’는 등의 구호를 내붙이고 주한 미국대사와 면담 등을 요구하며 만 72시간 만에 농성을 풀고나와 경찰에 모두 연행된다. 학생들은 농성과정에서 미국 측과 15차례 정도 대화를 가졌으나 미국 측은 광주사태에 대한 책임이 전혀 없으며 미국 측 입장과 농성학생들의 입장을 공개 보도할 의사 없이 식사문제까지도 협상조건으로 내걸어 대화의 한계성을 인식, 농성을 푼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농성학생 73명 중 학생 대표인 서울대 삼민투위 위원장 함운경군 등 25명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구속하고 농성 동조자 43명을 즉심에, 단순가담자 5명은 훈방 조치했다.

한편 이들에 대한 학사처벌 문제와 관련, 관용을 베풀었다는 이유로 이현재 서울대 총장이 전격 경질되었다. 또 이들에 대한 첫 공판 때 법정에서 방청객들과 함께 반정부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면서 사법사상 최초로 재판을 거부하는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봇물처럼 터진 반미운동

86년 12월 2일에는 전남대·전북대생 9명이 광주 미 문화원을 기습 점거해 농성을 벌이다 9시간 만에 전원 연행되기도 하는 등 반미운동이 봇물처럼 터지기 시작했다.

86년 3월 18일에는 대학생 40여명이 을지로 소재 미 공병단 후문에 화염병을 투척하고 ‘미제축출’을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같은 해 6월 8일 고려대 등 대학생 9명은 미 대사관을 월담, 대사관 현관에서 ‘미국은 물러가라’는 반미구호를 외치고 준비한 성조기를 찢는 사건이 발생, 그동안 금기시되어왔던 ‘반미운동’이 대학가로 급속히 확산된다.

반미운동은 다른 한편으로 전방 입소훈련 거부로 이어진다. 86년 성균관대와 서울대에서는 전방입소교육을 ‘양키의 용병교육’이라고 규정, 훈련을 거부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서울대에서는 86년 4월 28일 이재호군 과 김세진 군이 ‘양키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반대’ 등의 구호를 외치며 온몸에 시너를 섞은 휘발유를 뿌리고 분신하는 사건이 발생해 큰 충격을 주었다.

대학생들의 분신 자살 충격은 5월 20일 문익환 목사의 초청강연이 열리고 있던 서울대 교내 학생회관 옥상에서 원예과 1년 이동수 군이 ‘민중은 말이 없고 우둔하지만 결코 죽지 않는다’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하는 등 분신자살이 끊이질 않았다.

전방입소 거부운동은 이후 전국 대학으로 확산됐으며 결국 89년 1학기부터 대학생 군사교육을 완전히 폐지하기에 이른다.

■ ‘통일의 꽃’ 임수경의 방북

1989년 6월 30일 한국외대 임수경 양이 전대협 대표자격으로 평양축전에 참가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남한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일본과 독일을 거쳐 평양에 도착, 환영 인파와 보도진에 휩싸인 채 “북녘 형제들과 만나 굉장히 기쁘고 감격스럽습니다”며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으로 첫선을 보인 임수경은 이후 8월 15일 판문점을 넘어 귀환하기까지 국민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국내 대부분 매스컴은 그녀의 방북활동에 대해 연일 우려와 비난을 퍼부었고 진보적 진영에서는 찬사를 보내는 등 뚜렷한 시각차를 나타냈다.

임 양은 평양축전 참가 후 7월 27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을 시도했으나 통과 승인이 거부되자 6일간 단식농성으로 실신, 결국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파견한 문규현 신부와 함께 휴전선을 넘었다. 임 양의 판문점 통과는 남북대화 과정 및 두 차례 망명사건을 제외하곤 처음 있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당시 임 양의 방북을 비롯, 문익환 목사 입북사건 등 일련의 통일운동을 놓고 통일운동의 위상과 추진방법론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즉 국민적 연대감과 대중적 투쟁의 뒷받침이 없는 선도적 투쟁은 성공할 수 없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입력 : 2004.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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