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가요라는 하나의 갈래가 정착한 것은 80년대 이후의 일이다.
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은 일반학생 대중과는 다른 인식, 다른 생활·문화를 가짐으로써 자신의 모든 것을 반성하고, 바꾸고자 노력하며 대학생활 4년 동안 일생을 거는 결단을 해야 했다. 따라서 이들은 대중가요에 대해서도 비판적 관점을 가지면서 대중가요가 가지는 체제 순응성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가지고 자신의 노래문화를 반성하였으며, 새로운 노래문화를 원하였다.
체제에 대한 비판적 인식
민중가요는 바로 이때, 즉 학생운동권의 노래문화로 시작하였다. 대중가요에 대한 비판 내지는 극복의 전망을 가지고, 대중가요와는 구별되는 향유층, 별도의 존재 방식을 가진 독자적인 노래문화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70년대 ‘아침이슬’이나 ‘늙은 군인의 노래’ 이후에는 대중가요의 가사만 민중적으로 바꾼 ‘노가바’(노래가사바꾸기) 등이 유행했으나, 그 뒤 ‘광주 출정가’, ‘선봉에 서서’ 등의 본격적인 민중가요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대학내 노래 동아리들도 민중가요 일반을 받아들이고 보급하는 운동성을 띤 동아리로 변모해 갔다.
80년대 중반 이후에는 대학 등에서 조직된 노래패들이 활발히 활동하면서 민중가요가 활동영역을 넓혀가기 시작했고, ‘전대협 진군가’,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 등을 작곡한 윤민석과 ‘철의 노동자’ 등을 작곡한 김호철 등 스타 작곡가들도 배출되기 시작했다.
또 87년 6월 항쟁으로 각종 금지곡들이 해금되는 상황이 가요계에 발생하고 이전보다 합법적 공간이 확대되자, 87년 10월 ‘새벽’을 중심으로 하여 마침내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이라는 음악운동 집단이 결성됐고, 음악평론가들은 노찾사로 대표되는 이 시기 민중가요의 대중가요권 진출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노찾사의 등장과 의미
이들의 등장은 대중가요의 검열성 심의의 기준을 크게 완화시켰다. 이들은 처음부터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진보적 대중들의 기세를 바탕으로 등장하였기 때문에 공연을 통해 이미 인기를 얻은 작품들을 무조건 심의에서 가위질 할 수 없었다. 따라서 ‘민중의 넋이 주인되는 참세상 자유 위하여’,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등 이전의 심의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표현들이 심의를 통과했다. 이는 이후 대중가요의 표현과 사유의 폭을 크게 넓히는 기본 조건을 형성해 주었다.
또 대중가요권 내에 진보적 진영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랫동안 활동이 금지되어 있었던 김민기는 물론이고, 80년대 전반까지만 해도 그냥 독특한 포크 가수로 인식되었던 신형원과 한돌, 자생적으로 사회 비판적인 노래를 짓기 시작하여 뒤늦게 민중 가요권으로 이적한 정태춘, 노찾사를 거쳐 간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인 김광석 등이 한 부류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존재가 없었던 대중 가요계에 이들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영향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외 노찾사는 기존 대중음악적 기법을 과감하게 도입하고, 선곡에 있어서도 일반 대중들과 교감할 수 있는 정서들을 중요하게 고려하였다. 노찾사의 이와 같은 대중 지향성은 ‘소시민적 대중 추수주의’ 혹은 ‘소시민적 우편향’ 등으로 요약되는 일련의 거센 비판의 표적이 되기도 했지만 노찾사 활동은 애초부터 ‘음악운동이 가진 운동권 문화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런 비판은 노찾사의 성과로 볼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90년대 중반 이후 주 수용층이었던 대학생들이 점차 정치, 사회적 문제에 흥미를 잃어가면서 민중가요 또한 그 힘을 잃어갔다.
입력 : 2004.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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